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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Dec 12. 2020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으로

반스앤노블에서 만난 너


오랫동안 서가에 놓아두었던 책에 손이 갔다.

언젠가 한 번은 쭉 정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그러기 쉽지 않았던 녀석.

쳅터 하나 정도만 읽어보려고 펼쳤는데 제법 재미가 느껴진다.     

빨간색 하드 카바, 큼지막한 사이즈, 묵직한 두께와 고급스러운 종이 질, 칼라사진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눈에 띈 책이었다. 이 녀석을 만난 건 1994년 겨울, 맨해튼의 반스앤노블이었다.   

   

느지막이 군대에 가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의 군기에 눌려 집합과 얼차려 어둠 속에서의 폭력을 경험하고 막 제대한 시점이었다. 근 3년에 가까운 군 복무로 사회와의 현격한 거리감을 느끼던 때였다. 그 간극을 메꾸고 싶은 마음이 형이 살고 있던 미국을 처음 방문케 한 계기였다. 복학 전, 달랑 한 달가량의 여행인데도 미국 비자를 받는 심사 줄은 길고도 험난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간 여행이었기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남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스앤노블 서점에 들른 이유도 그래서였다.      

돌아가서 4학년으로 복학하면 제대로 책도 읽으며 전공 학문에 심취해보고픈 욕망도 있었다.

서점의 이곳저곳을 돌며 구경하다가 사회과학서적의 구역으로 들어섰다.

사회학 Sociology의 서적들을 들춰보다 이 책에 마음이 꽂혔다.

‘원서강독’ 시간에 책 원본을 카피한 복사본으로, 때론 낱장 복사본 몇 장으로 내용을 읽던 시간들을 생각하니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비싼 가격이지만 서슴없이 책을 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뿌듯했지만 책은 서가에 꽂혀 오랜 시간 자리만 차지했었다. 몇 년 전에는 큰 맘먹고 처음부터 읽어 내리기도 했지만, 막히는 단어를 찾아내느라 재미를 잃어버리곤 했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버려지지 않았다. 대학 때 공부했던 사회과학 책들은 이미 누렇게 색이 바래서 좀 슬었거나, 소장하고 있기에는 너무 급진적이던 금서이며 양서라 신변안전을 위해 처분돼야 하는 부류들이 많았다.  

그렇게 폐기하고 버린 책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성성한 모습으로 남겨진 책에는 깊은 애정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종이의 질과 책의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물론 기약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읽고자 비닐커버로 정성을 들이긴 했었다. 군데군데 읽다 중단한 흔적을 부끄럽게 바라보며 책을 넘겼다. 종교와 사회 부분 쳅터를 넘기다 뒤르카임이 바라보는 종교관에서 어떤 뜨거움이 울컥 솟구쳤다. 사회학 책이 나를 여전히 피 끓게 만든다는 사실에 새삼 움찔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에는 정독하며 끝까지 읽어낼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나를 지적으로 자극하며 좋아하고 가치 있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영상제작을 가르칠 때에도 미디어의 정석에 해당하는 책들을 끝끝내 읽어냈다.

한 번으로 부족하다 싶어서 여러 번 서너 권의 책을 공부했다. 우리말로 개념을 갖고 있지만 표현은 영어로 해야 서로가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회학도 마찬가지다. 이 책이 나에겐 사회학의 캐논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책도 있지만 그건 일단 다음에 구입하는 것으로 미룬다. 성경은 NIV 버전으로 꾸준히 묵상하는 중이다.    

 

내가 우리보다 더 어렵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학이라는 학문이고 영상제작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이며 성경의 말씀이다.  

   

오래전,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각오와 책임 그 이유가 다시금 선명하게 내 앞에 펼쳐졌다.

책임감으로 즐겁고 깊게 독서의 희열로 나를 몰아세운다.      

글이 여전히 나를 가슴 뜨겁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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