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이 없는 눈으로 걷는다. 눈에 힘을 거의 풀어버리면 나는 짝눈이 된다. 오른쪽이 더 크고 왼쪽이 더 작다. 나는 짝눈으로 걷는다. 터덜 터덜. 몸에는 걸을 수 있는 정도의 힘만 가지고 있다. 이렇게 걸을 때면 나 스스로 살아있는 고깃덩어리라고 느낀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숨 쉬고 걷는 것뿐인 고깃덩어리. 바람이 분다. 저항도 없이 바람을 맞는다. 바람은 내 뺨을 세게 때린다. 찰싹 슝. 가을 공기는 차고 시원하고 건조하고 맑다. 나는 우울할 때 맛있는 음식보다 냉기 도는 바람이 땡기더라. 코로 흠씬 바람을 먹어버린다. 그 바람은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채워준다. 이건 나의 일부분이 되고 나는 그 힘으로 몇 분 더 걸어본다.
언제부터 내가 우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일기에 죽고 싶다고 적었다. 당연히 나의 자살사고는 선생님을 통해 엄마에게로 전달되었고 엄마는 걱정했지만 어찌할 줄을 몰라 기억나지 않는 말로 나를 달랬다. 그 때 치료를 받았으면 조금 나아졌을까 가끔 생각한다.
2. 내가 죽으려고 시도한 횟수이다. 한 번은 20대 초반. 충동적으로 문구점에서 커터 칼을 샀다. 반짝이고 날카로운 새 칼로 내 손목을 그으려고 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칼을 몇 번이나 손목에 대었지만 결국 긋지 못했다. 그리고 울고 싶었지만 울지 못했다. 울지 못한 마음은 결국 까맣게 뭉쳐서 내 몸 어딘가에 보관되어졌다. 이런 건 보통 염증이 되어 몸 어딘가에 박혀 악화 된다는데. 그래서 색이 변하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전이 된다고 하는데.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 나는 더 몸집이 커진 우울과 불안을 만날 수 있었다. 너는 죽지도 않고 또 왔구나. 그래. 너랑 나 뭔가 해보자. 나는 자취방에서 과도로 손목을 그었다. 이번에는 진짜 그었다. 충분히 세게 그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상상대로 피가 철철 나지는 않았다. 젠장. 얼마나 더 세게 그어야 동맥인지 뭔지가 끊어지는 건지. 다섯 번 정도 그었을까. 여전히 피는 흐르기 보단 고여 있어서 결국 다른 방법으로 죽으려고 했다. 물론 그것도 실패해서 나는 지금 건강하게 글을 적고 있다. 왼쪽 손목에는 갈라진 살점을 꿰맨 흉터가 다섯 줄 있다.
죽기로 한 날 나는 죽는 걸 실패했다. 애매하게 실패해 나는 응급실에 가게 되었고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나를 위해 죽으려고 했지만 가족들은 자신들을 위해 내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 모습이 퍽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도 가족을 사랑하기에. 그들이 힘들어 하는 건 나도 보기 어렵기에 나는 죽다 살아버린 날 가족을 위해서 한 번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약 7년 정도가 흘렀지만 여전히 우울과 불안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하얀색. 주황색. 적갈색. 민트색 알약들이 도와줘 크기는 조금 작아졌지만 말이다. 자살사고도 덜해졌지만 아예 없어지지는 않아 종종 나를 괴롭힌다. 나는 내 목을 스스로 졸라 죽이는 상상을 자주한다. 약으로도 차도가 없을 땐 걷는다. 초점 없는 눈으로 고깃덩어리가 되어 걷는다. 중얼 중얼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이게 힘들고 저게 힘들어. 그러다가 바람이 불면 바람의 도움을 받는다. 바람이 내 뺨을 찰싹 슝. 정신 차리고 저기 저 풀이나 좀 봐봐. 나는 걸을 때 초록색이 보이면 손으로 만져보곤 한다. 초록에는 생명이 있다. 내 몸 속 생명과는 확실히 다른 생명. 역동적이고 의지가 가득한 생명. 그 생명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움튼다.
내가 사용했던 칼 두 개. 그것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기에 영원히 폐기 되었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들은 조각내어져 내 몸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조각난 날카롭고 반짝이는 것들이 자주 내 마음을 혹은 내 뇌를 긁는지도 모른다. 이건 독감보다 더 독하고 더 질긴 질병 같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 상관없다. 나는 점점 조각난 칼을 녹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있다. 예컨대 엄마는 풀은 사랑한다. 본가에는 엄마가 정성들여 키운 풀들이 베란다에 한 가득이다. 피는 속일 수 없는지 나도 풀을 참 좋아한다. 다행이다. 생명이 깃든 풀들을 좋아해 다행이다. 흐르는 물. 부는 바람. 촉촉한 흙과 벌레들을 좋아해 다행이다. 생명이 가득한 것들. 나에게 부족한 생명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이 채워주고 있다. 나는 점점 힘이 커지고 있다.
나는 살기로 했다. 이왕 사는 거 잘 살아야지. 그리고 드디어 내 안의 우울과 불안과 싸울 준비를 했다. 너희들은 결코 나를 정복할 수 없어. 엿 먹으라는 생각이 내 뇌를 땅 따먹는다.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매우 다르다. 이길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엿 먹일 수 있다. 우울하지만. 불안하지만 희망을 갖는다. 나는 이걸 차가운 희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차가운 희망. 생명의 희망. 초록의 희망. 나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싸워서 이길 것이다. 기어코 승리해 내 뇌에 승리의 깃발을 꽂을 것이다. 나는 살아낼 것이다. 어김없이 다시 바람이 분다. 찰싹 슝. 저기 저 풀 좀 봐. 너를 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