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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Jul 20. 2023

나의 결혼일지 04 - 패션에 관하여

너 지금 뭘 입은거니?



나는 소위 '남자 친구룩'에 대한 구체적인 로망-심지어 브랜드까지-이 있었다(비록 지금은 남편이지만 한때는 남자친구였던 사람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때로 어필도 해보고(아, 네가 옷을 이렇게 입으면 정말 멋질 텐데 말이야) 내가 원하는 남자 친구룩을 실현시켜 줄 옷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개중 남편이 제일 잘 입었던 것은 흰색 무지 티였을 뿐, 나머지 옷은 벽장에 처박혀 있다가 보풀만 잔뜩 일어난 채로 묵혀지고 있다······.



남자친구였을 때는 내가 좋아할 만한 옷을 종종 입고 나타나서 내가 환호를 지르게 해 주었지만(절대 강요한 것은 아니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그냥 칙칙하고 어두운 색 옷이 싫다고 말했을 뿐이지),




결혼하자마자 나의 취향과 정 반대되는 옷만 입어서 약간의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데이트하면서 입은 옷들 하나하나가 그저 미끼고 난 그걸 덥석 물어버렸다는 건가.




남편은 이 세상에 딱 두 개의 스포츠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 '파타 000'과 '아크 000'만 있다면 아무 불만도 없을 만큼 두 개 브랜드를 애정하고 있으며, 어느 쇼핑몰에 가던 그 두 개의 매장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간다(나는 매장에 들어가는 즉시 비치되어 있는 의자에 앉는다). 



두 브랜드를 '근본'이라고 단언하고 찬양하면서, 또 가장 즐겨 입기 때문에 가끔 나를 울적하게 만들곤 한다. 물론 두 브랜드는 아주 훌륭한 브랜드이고 나도 유용하게 입지만, 



당장이라도 조기 축구를 하러 가거나 러닝을 하러 갈 것 같은 차림으로 날 향해 환하게 웃는 남편을 볼 때마다 쓴웃음을 짓고 마는 것은, 스포티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남편이 '나 어때' 하고 뽐내면 마음에 없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네 패션 센스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주긴 하지만, 남편이 그럴 때마다 아쉬운 입맛을 쩝 다실 수밖에(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눈감고 있음을···).




남편은 내가 분홍색이나, 레이스가 흘러넘치거나, 트위드 재질 옷을 입고 나서(나는 언제나 이런 옷에 환장한다) 나 어때, 하면, 중립적인 입장이라고-중립적인 입장이 대체 뭐야 하면 좋지도 싫지도 않은 거야,라고 손을 뒤집어가며 어깨를 으쓱하는데 얄미움이 극에 치닫게 되는 포인트-,



내가 거짓 엄지 척을 날리는 반면 남편은 나의 옷 취향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모호하게 반응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옷이 여섯 번째였나··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남편이 제발 분홍색 그만 사! 공포에 질려 외치기는 했다.




같은 분홍색이라도 재질이나 컬러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데 그만 사라니, 말도 안 되잖아,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 작정이고 남편의 의견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아, 이런 게 바로 내로남불인 걸까?




이렇다 보니 여행지 패션도 두 사람이 갈리기 마련인데, 파리에 간다면 촌스럽다고 비웃음을 살지라도, 

나랑 똑같이 입고 있는 사람이 백 명 있더라도



(나랑 똑같이 입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게 더 신기했다. 너무 촌스러워서···아무도 그렇게 안 입는 건가? 파리 여행 가는 친구에게 진주 목걸이랑, 같이 어울릴만한 타탄체크 목도리를 선물했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걸로 봐서 신빙성 있는 가설이라 씁쓸하군)



스트라이프 티셔츠랑, 파아란 청바지 입고 나서 빨간 카디건 하나 가볍게 어깨에 턱 걸치고, 빨간색 플랫을 신고 기왕이면 베레모를 쓴 다음, 진주 목걸이까지 걸어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남편은 여행지에서도(그가 여행하는 거의 내내, 총기간의 2/3을 아팠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파타 000 패딩과 청바지 아니면 흰색 티와 청바지를 입어서 티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왜 저래 진짜).



남편은 평소에, 특히 특정 계절이 다가오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들을 사다 주면서(파타 000의 경량패딩과 아크 000 바람막이, 아식 0 운동화 그런 것들) 이 옷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강조해서 설명하고 내가 그 브랜드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내가 남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그 옷들을 너무 잘 입어서 남편이 거 보라며 우쭐하게 만든다는 거지만, 그런 옷을 입은 날은 어디 가서 내가 꾸몄다고 말할 수 없고, 혹시 사진을 찍을 일이 있다면 조용히 벗어서 둘둘 말아 내려놓는다(남편이 사준 옷은 대체로 잘 구겨지는 것들이다).




남편이 사준 옷들은 가볍고 따듯하고 튼튼해서 모두에게 추천할 만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롱 패딩을 입고서 꾸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옷 입는 기준에서는 그렇다.




이토록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한 명은 경량패딩에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인데 한 명은 트위드 재킷에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차고 구두를 신고 있는-다투지 않는 이유는 서로 영혼 없이 예쁘다, 사라, 어울린다, 를 연발하거나 어깨만 으쓱거리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 입맛을 강요해 봤자 귀등으로도 안 들을 서로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귀엽게 봐주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마도, 좀 더 예뻐해 주거나 귀여워해 주면 되는 사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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