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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Jul 22. 2023

나의 결혼일지 09 - 공황에 관하여(2)

결혼 후 공황 이야기



내가 공황임을 알고 나자, 그동안 나 혼자 간직했던 몇 가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어느 날부터 (구) 남자친구와 앉으면(사실 남자친구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랬겠지만)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긴장이 되는 거라.


사귄 지 이년이 되어가는데 갑자기,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결혼을 앞두고 이 남자에게 지독히 빠져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굳을 정도로 긴장하나 보다 했지. 그건 그냥···새삼스레 (구) 남자친구에게 반한 게 아니라 공황 증상 중 하나였던 거다.


약을 먹으니 아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런 증상은 훨씬 나아졌다. 담에 걸렸다고 생각했던 각종 증상이 사라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아프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고, 간단하고, 허무한 일이었다.아마 그때 통증의학과 교수가 날 정신의학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공황인 줄도 모르고 10년이나 배앓이를 했댔으니 난 운이 좋은 편이었던 셈이다.

그렇잖아, 보통 몸이 아프면 그 부위에 해당하는 병원엘 가지, 공황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내가 너무 둔감한 나머지 몸이 나서서 콕콕 찍어가며 알려준 거일 수도 있겠지만·‥.


약을 처음 먹을 때는 시간, 장소 가릴 것 없이 잠이 마구마구 쏟아져서 난감했다. 다리를 아무리 오므려도 터져 나오는 오줌 막을 수가 없는 것처럼 절로 눈이 감겼다. 최소 50명은 사람으로 복작거리는 사무실 책상에서나, 사람은 적지만 그래서 더 주목받기 딱 좋은 회의실에서 회의 도중 꾸벅꾸벅 졸다가 흠칫 깨곤 했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화장실 변기나 바닥에 퍼질러 앉아 마음 놓고 졸러 갔다.


결혼한 뒤 거주환경과 사무실이 바뀌고 약 복용기간이 점차 늘어감에 따라 몸은 훨씬 좋아졌다. 많은 것이 바꾼 덕분인지 모르지만 잠도 전보다 잘 잤고,

무엇보다도 아침마다 자동으로 들던 '음, 오늘은 별로 살고 싶지 않군'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공황이나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살고 있었다는 건가. 호오, 죽음에 대한 생각 없이 하루를 살 수 있는 거구나.

(아니, 나도 진짜로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냥, 정서의 기본값이 그런 거였다는 거지)


이렇게 삶의 그래프 곡선이 우아하게 한 번 올라갔으면 다음은 뭐다? 안타깝지만···바로 내려오는 것···(삶, 당신이란 대체) 인생의 단짠단짠은 어쩜 이렇게 정확한 진리일까 싶게, 빠르게, 저 아래쪽으로 자꾸만 치달았다. 덩달아서 공황 증상과 우울감도 다시 심해졌는데 전과 달리 내 힘으로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눈물이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꾸만 났다.  

회사 화장실에서 굶주린 들개처럼 울부짖는 바람에

누군가 괜찮냐며 문을 두드린 적도 있고,

옆 팀 사무실에까지 소문이 났다고 했다

(그 주임님···울던데···괜찮으냐고···아뇨, 전혀···).


회사에서도 그랬는데, 집에서는 어땠겠어······.

연애하는 동안 남자친구 앞에서 운 적이 없어서 그런 걸 보여줄 일이 없었다. 울면 나 혼자 울지, 남자친구를 나 서글픈 일 나눌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건 모든 연애 상대에게 공평하게 그랬지만-

내 짐승 같은 눈물바람을 봐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침대나 소파에 까라져 주르륵주르륵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자면 남편은 휴지를 뭉쳐 내 눈가를 가볍게 두드리며 왜 우냐고 묻고 나는 공황이라 그래,라고 자연스럽게 답했다. 공황이니까 울지, 울긴 왜 울어. 원래 공황이란 이런 거야,라고.

공황을 처음 겪고 있는 남편이 당황하지 않도록.


집에 새벽에 들어오고, 회사나 집이나 길거리에서 이 킹 거리며 흐느끼는 아내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남편이란 대체로 없을 테지만(그런 사람도 있더랍니다 글쎄), 남편은 괜찮아 보였고 가는 곳마다 베이글이나 크림치즈를 사 와서 날 기쁘게 해주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이 '얘 인생이 좀 걍팍할 듯 하니 귀여운

남편을 점지해 주자', 하신 거라고 감사히 생각했다.


나는 남편한테 미안했다. 난 얘가 정말 좋지만 얜 어쩌다 이 모양인 나랑 결혼을 해서···, 당장이라도 회사를 때려치울까 말까 하는 나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남편한테 진심으로 미안했다. 흔들리지 않는 안정, 인생은 시몬스 침대처럼이 인생 모토인 남편에게 나는 너무 파격적이고 충동적인 존재였다. 살면서 로또 한 장 사본 적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것은 싫어하고, 모든 일에 다 계획이 있는 남편은 자주 불안해했다.


남편이 세운 미래 계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가 불안정하기 짝이 없으니까 당연했다. 일례로, 가정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내가 경제활동에서 발을 빼면 지금까지 남편이 세워둔 계획들은 모두 무산되는 거였다.


한 달에 얼마를 모아서, 일 년이면 얼마가 되고, 집은 언제 장만하고 하는 그런 현실적인 계획들 말이다(미안하게도 나는 딱히 관심 없던···).


내가 미안해하면 남편이 너 정말! 그런 말 말라며 화를 냈다(이거 정말 로맨스 드라마 같은 장면이네).

자긴 눈물이 없다며, 내가 영화 보고 눈물을 글썽일 때

저거 다 허구야, 허구. 하고 날 비웃으며 산통 깨던 남편이(유행하는 말로 하면, 남편 너 T발 C야?), 내가 울면서 미안해하면 자기도 같이 주룩주룩 울었다.

절대로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돌아가도 꼭 나와 결혼하겠다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내 의견은 안 물어보니···).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하면, 뻔뻔하게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은 많이 가셨고요. 저는 회사를 빠져나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으나 가정경제는···좀 기울어졌습니다.


이 회차에서만큼은 어설프게라도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공황은 현재진행 중이며, 나랑 같이 살다가 언제라도 나보다 더 높이 고개를 들고 날 삼킬지 모르는 거니까.


굳이···그래도 결에 다다르자면, 글쎄, 어, 공황에 걸리신 분께는, 일단 갑작스러운 공백 없이 약 잘 드시고 병원 주기적으로 방문하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병원 휴가인지 몰랐다가 갑자기 약을 못 먹게 되어

금단 증상에 시달렸던 사람으로서의 조언)


공황에 걸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시는 분께는, 힘드시죠? 치료나 구제는 전문의가 담당할 거지만 당신의 존재가-당신에게 미안하게도-굉장히 중요하답니다.


어,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이게 참,

어려우시겠지만 다정하게 관심 가져주시면 좋을 거예요. 세르토닌도 중요하지만,

이 병에는 사랑도 너무 중요한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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