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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Jul 25. 2023

나의 결혼일지 11 - 사진에 관하여

스드메에서 당신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혼을 준비한다면 누구나 알 법한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대사 중, "스즈메-?"를 상상하며 읽어보세요)


스튜디오, 즉 웨딩사진 촬영을 '스'라고 하게 된 건 아무래도 스튜디오에서 화보처럼 찍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그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스드메' 중 '스'를 맡게 된 모양이다. 저렇게 찍은 사진은

휴대폰 배경화면으로도, 예식장 데코로도, 특히 청첩장 사진으로 많이 쓰인다.


나는 스튜디오에서 하얀 벽이나 정원을 배경으로,

신랑과 약간 거리를 두고 벽에 기댄 포즈를 취한 거나 서로 이마를 맞대고 서있는,


누구 모바일 청첩장을 열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남들 다 비슷한 거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인데도 굳이······.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경조사 알림 게시판에 핀터레스트에서나 볼 법한 누군가의 모바일청첩장을 보게 되었다. 앵글을 자유분방하게 꽉 채우고 있는 둘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재기 발랄했다.


고전적인 하얀 실크드레스를 입고서 얼굴을 꽉 찌푸린개구쟁이 같은 신부의 얼굴, 삭발을 하고 검은색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허공을 폴짝 뛰고 있는 신랑,

웨딩사진이 아니라 보그나 엘르 같은 패션잡지를 보고있는 것 같아서 와-멋지다-모델 같네-를 연발하며

몇 번이고 누군지도 모르는 남의 결혼사진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바로 그 느낌이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그분에게 용기 내서 사내 메신저로 연락을 했다. 실례지만 회사 게시판에서 두 분 결혼사진을 봤는데 너무 멋지시다고, 모델 같다고!



'아, 제 아내 직업이 실제로 모델이에요. 하하하. 사진은 제 친구가 잡지 전문 포토그래퍼라서 그렇게 찍어줬어요.'

'···예? 아, 예, , 그렇군요. 축, 축하드립니다···.'



사진이 잡지처럼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

잡지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가와 모델이 찍은 건데 결과물이 화보인 거야···뭐, 치자물 넣어서 빨간 반죽 나오고, 그거 찌면 분홍색 송편 나오는 거랑 똑같지.

콘셉트가 뭐가 중요해···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인 법인데···하는 생각이 들며 열망은 푹 수그러들었다.


내 안의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다른 선택지를 뒤적여 봤자 아닌가. 이런 촬영을 살면서 언제 또 이렇게 본격적으로 해볼까 싶어서 결국 스튜디오 촬영은 하지 않기로 했고, 야외에서 필름카메라로 스냅 촬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전부터 팔로우해 오던 사진작가님께 DM을 보내 예약일정을 잡았고 두 분의 사진작가님과 함께 서울숲에서 야외촬영을 하기로 했다.



이런 촬영의 단점이라면 메이크업, 드레스 업체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개인 작가인 경우가 많아서

드레스 대여와 헤어메이크업, 소품(꽃다발이나 면사포 기타 등등)을 직접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친언니에게 언니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와 면사포, 머리 장식을 빌렸고

(언니는 기념일 때마다 입겠다며 결혼식 드레스를 사서 입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안타깝게도···)


남자친구는 제가 입을 옷으로 흰색 폴로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 작은 꽃다발을 알아서 준비해 왔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직접 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것도 같이 예약했다.


좀 더 캐주얼한 촬영용 원피스는 촬영 전날 코엑스를 이 잡듯 뒤지다가 마침내 미쏘에서 저렴한 걸로 구했다. 하필이면 촬영 전날이 되어서야 옷을 구하느라 꽤 속을 끓였지만 코엑스니까 그 시간까지 영업 중이지, 늦은 시간 영업 중인 옷집도 없을 터였다(누굴 탓할 수 있겠어?).


나는 언니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입은 채로 서울숲 근처 스타벅스에서 두 작가님과 만나 아이스 브레이킹차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스몰 토크를 하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세요?,

마지막 점검 차원에서 올리브영에 들러 마스카라를

덧바르며 결의를 다졌다.


'오늘 한 번의 촬영으로 앞으로 쓸 모든 사진 다 뽑고 가는 거다···'


많은 사람이 찾는 오픈된 공간에서의 웨딩 촬영이라면부끄러울 것 같겠지만 딱히 그렇지 않다.

내 옆에, 그리고 저 건너 맞은편에, 똑같이 광대를 한껏올리고 허공에 소리 없는 웃음을 발사하고 있는 예비부부가 넘쳐난다. 누구는 풍선꾸러미를 들고 있고 누구는 피크닉 콘셉트이다. 서울숲은 많은 예비부부에게무료 스튜디오인 셈이다.


두 사진작가님의 열정적인 리드 속에서 우리는 입가가떨릴 만큼 웃고 또 웃었다.조금이라도 지치거나 가식적인 기색이 보인다면 두 분은 우리를 매섭게 채찍질했으며 -자본주의 미소 짓지 마세요!

'너무 예쁘다'를 연발하며 숙련된 조교의 태도로 우리를 조련했다.


한여름인 데다가 전날 온 비로 무척 습했기 때문에 날씨가 주는 체력 소모가 엄청났고 오로지 우리 두 사람과 작가님들 뿐이니 세팅에 드는 품도 온전히 우리 몫이었다.

(촬영 컨디션을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야외 스냅의 단점이다)



또 다른 문제라면, 이건 나만의 문제였을 수 있는데···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여섯 시간 동안 촬영을 하는 동안


남자친구 목에 팔을 둘렀다가, 두 팔 번쩍 들어 안겼다가 온갖 포즈를 다 취하는 것은 내 겨드랑이를 너무 많이 노출하는···그러니까 나의 체취가 몹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땀을 흘리는 수준이 아니라 습기에 거의 절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중에 틈틈이 향수를 뿌리긴 했지만···겨드랑이에 대한 생각이···촬영하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습한 날 서울숲 잔디를 구르다시피 하며 촬영에 온 힘을 다 쏟은 두 분 작가님과 헤어지는데 촬영대금인

(약) 100만 원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이 날 찍은 사진은 결혼 과정-심지어 결혼식장에서 찍은-에서 찍은 모든 사진 중

여전히 가장 잘 쓰고 있고 무척 만족스럽다(결혼식장에서 찍은 사진앨범은 소파 밑에 고이 모셔놓았다).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은 몹시 부자연스러웠으나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는 수줍은 손길, 찡그린 코웃음 하나마저 만들어진 것이라면···믿으시겠습니까?)


결과물이 자연스럽고 내가 추구하던 빈티지 감성과도 잘 맞아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들여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요즘 모바일 청첩장에서 스튜디오 웨딩사진을 볼 때마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에서 이 사람들처럼 화보 느낌으로 한 번 더 찍자!"


스냅은 스냅의 맛이 있는 거고 스튜디오는 또 스튜디오 촬영만의 매력이 있는 건데

어떻게 하나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뻔뻔).


사랑은 몰라도 사람은 변화무쌍하다는 마무리로,

오늘의 결혼일지를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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