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3일 차, 남편이 병들다
관광객 룩으로 한껏 꾸민 우리는 파리국립오페라극장에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서, 종잡을 수 없는 이름의 제일 저렴한 편에 속했던 메뉴 두어 개를 주문해서 점심으로 먹었다. 차갑게 식은 라비올리 파스타와 소고기 스테이크인 줄 알고 시킨, 정체를 알 수 없는 소금에 절인 햄을 서비스로 나온 빵과 함께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이게 10만원어치 점심이라는 걸 서로에게상기시키며.
아마 우리가 주문한 것은 식사가 아니라 와인에 곁들여 먹는 술안주였을 것이다. 주변 외국인들이 길쭉한 잔에 샴페인을 마시는 동안 우리는 짠기를 가시려고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점심을 먹은 뒤 라파예트 백화점 옥상에 가서 음식이 얼마나 맛없었는지 툴툴대며 에펠탑과 파리 시내 전경을 실컷 구경했다.
남편은 저녁도 양식을 먹을 수는 없다고 했다. 나도 점심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터라 대찬성이었다. 지디가 파리에 가면 꼭 들린다는 유명한 우동집에서 남편은 허한 속을 달래줄 국물을 마시기 위해 새우튀김우동을 주문했고, 나는 마제소바와 우엉밥과 가라아케 튀김이 조금 나오는 미니세트를 시켰다.
미니세트를 추가로 시키길 잘했다. 그곳의 마제소바는 한국에서 흔히 먹던 양념장에 비벼 먹는 우동이 아니라, 간장소스를 부어 다진 마늘과 비벼 먹는 아릿하고 낯선 맛이었다. 우동을 밀어 두고 따듯하고 고소한 우엉밥을 한 톨 한 톨 소중하게 먹으며 쌀밥의 귀중함과 밥심이란 과연 무엇인가, 새삼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스타벅스에 들러 밍밍한 아이스 카페라테-파리에서 보기 어려운 아이스 음료를 파는 곳-를 테이크아웃해서 루브르 박물관 잔디밭으로 갔다. 어려서부터 쯔쯔가무시에 대한 두려움을 익히 들었던 한국의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도 역시 맨 잔디 밟기를 꺼려했는데, 파리 젊은이들은 맨 잔디 위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거나, 책을 얼굴에 덮어쓰고 이른 저녁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파리까지 가놓고, 루브르 박물관은 입구에도 안 들어가 보고 잔디밭만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라고 남편과 웃으면서 루브르 박물관 주변을 거닐다 숙소로 돌아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으로 나온 빵과 각종 치즈, 버터와 과일을 흡족하게 먹은 우리는 우버를 탄 다음 메르시 지구로 향했다. 메르시 지구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남편의 말을 흘려들으며 바깥을 구경하던 중, 직진 중이던 우리가 탄 차를, 왼쪽에서 들어오던 차가 들이받았다. 누가 먼저 지나가네 마네, 옥신각신 약간의 실랑이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차를 차로 밀친다고?
상대방 운전자의 말보다 빠른 행동에 황당하여있는 것도 잠시, 거친 욕을 주고받던 양편의 운전자들은 곧 차가 아니라 몸을 박기로 마음먹었는지 서로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차 안에서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경찰이 있어 말리러 오긴 했지만 싸움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듯이 차에서 뛰쳐나왔다. 소동이 일단락되고 만난 운전기사는 택시비는 필요 없다며 '쿨하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우리는 메르시 지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음날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남편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다고 했다. 체한 것 같다기에 급하게 약국으로 약을 사러 갔다. 날이 흐려지며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탓에 거리는 우중충하고 음울했다. 그 와중에 제 아침을 챙겨 먹겠다고 잠봉뵈르 샌드위치와 따듯한 카페라테를 사고 있는 스스로에게 '인간이란'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남편에게 약을 챙겨준 뒤, 파리까지 와서 앓아누워야 하는 불쌍한 남편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남편이 빵과 햄 냄새가 못 견디겠다고 울먹이며 고개를 팩, 돌렸다. 나는 황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남편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등을 돌린 뒤 묵묵히 아침으로 사 온 샌드위치와 커피, 어제 남편이 사 온 베리를 모두 먹었다. 이 와중에 맛있게 아침을 먹다니,
다시 한번 '인간이란'······.
남편이 아프든 말든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이동해야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남편과 택시를 타고 다음 숙소로 넘어갔으나, 체크인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남편은 힘없이 로비 소파에 파묻혔다. 이 와중에 점심 먹을 시간이 됐지만(인간이란), 남편은 여전히 뭔가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 아무 가게나 들어 요기를 해결할 참으로 그를 로비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가까운 곳에 사람이 꽤 많은 딤섬 가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볶음면과 딤섬 몇 가지를 시켜서 울적한 마음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마침내 체크인을 한 뒤 남편은 여행객들의 땀냄새가 가시지 않은 침대에 누워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했다.
나는 한인마트에 가서 남편 먹일 비비고 죽과 사골국물, 그리고 아빠가 아플 때면 엄마가 오렌지를 깎아줬던 걸 떠올리며 숙소 앞 마트에서 물렁거리는 애플망고를 하나에 1유로 주고 사 왔다. 오, 정말 아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네. 우리는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구경하면서 죽과 국물을 퍼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