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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Aug 09. 2023

나의 결혼일지 19 - 여행에 관하여(4)

멀리서 보아야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남편은 내가 사랑과 정성을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린 비비고 죽과 사골국물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화이트 에펠탑을 조명 삼아 불 꺼진 호스텔 거실에서 나는 나 홀로 춤을 추었다. 걸으면 20분 만에 닿을 거리에 바로 그, 빵 사러 갈 때나 보던, 엽서에서나 보던 '에펠탑'이 있었다! 남편의 완치를 바라는 의식 같은 것은 아니었고, 나 혼자 너무 심심한 나머지···침묵 속에서 맹렬히 춤을 추다가 제풀에 지친 나는 남편의 곁에서 쓸쓸히 잠이 들었다. 에펠탑이 지척에 있는데 숙소에서 잠이나 자야 하다니······.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고 있는 남편을 두고 어제의 에펠탑을 보러 큰 창문이 있는 거실로 뛰어나갔다.

굿모닝, 에펠···앗, 저게 뭐람! 창문 바로 밑, 그러니까 숙소 바로 앞에서 큰 마켓이 열리는 중이었다.

경량패딩을 챙겨 들고 이번에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생에 상인이었나, 왜 마켓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건지 모르겠네. 핀터레스트에서나 볼 법한 사진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아직 보지 못한)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보다 훨씬 더 이곳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 저거 봐. 톰과 제리에 나올 법한 구멍이 숭숭 뚫린 거대한 에멘탈 치즈네. 앗, 저기에는 도넛처럼 눌린 모양의 납작 복숭아가 산처럼 쌓여있네. 사과가 어쩜 저렇게 알록달록할까···꽃집, 생선가게, 반찬가게, 단추가게 등등,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다리 아래 양쪽에 통로를 사이에 둔 노천 매장이 길게 이어지는 파리 한복판의 주말시장은 빛을 받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생기가 넘쳤다.



시장이 끝나는 길까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때에는 남편이 깨어 있었다. 어제의 극진한 간호로 기운을 차렸다고 한다. 나는 남편의 회복된 컨디션에 기대를 걸며 산책 가고 싶은 강아지처럼 동동거렸다.



바로 저 밖에, 어떤 게 펼쳐지고 있는지 봐야 한단 말이다(한번 본 걸로는 어림없지). 남편은 이동할 힘이 난다고 에펠탑을 보러 가자고 했고, 나는 시장에 들러 점심거리를 산 뒤 에펠탑이 보이는 잔디에서 피크닉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에펠탑을 보러, 나는 시장을 다시 한번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관광객스러운 옷으로 환복 했다.



소고기를 와인에 절인 비프 부르기뇽과 해산물 빠에야, 그리고 순전히 멋 내기 용으로 장미꽃 한 다발은 산 채로(바게트를 사서 옆구리에 끼지 않은 게 어딘가) 에펠탑 쪽으로 걸어갔다. 과연, 에펠탑은 20분도 안되어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라, 너무 가까이 다가간 탓이었을까.



코앞에서 본 에펠탑은 서울 한복판에서 공사 중인 흔해빠진 철근 건물을 보는 것처럼 근사한 맛이 없었고, 주말이라 사람들이 몰린 탓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잔디밭은 사진 찍는 사람 반 구구 우는 비둘기 반이었다. 잔디 위에서 비둘기에게 쪼이거나 사람들 발에 채이지 않고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날따라 유독 세차게 부는 바람까지 더해져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도로를 막아놓아 출구까지 빙 돌아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더욱더 진이 빠졌다. 에펠탑이고 뭐고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나와 남편은 거센 바람 때문에 허공에 흩날리는 장미꽃잎을 얼굴에 맞아가며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 향했다.



겨우 택시를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넋이 나간채로 벤치에 주저앉아-나는 듬성듬성 초라해진 꽃다발을 안아들고서-꽃이 말을 한다면 이런 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나를 원망할 것 같았다-하염없이 우버를 기다렸다. 우리는 우리의 간절한 부름에 일곱 번째로 응답해 준 우버를 타고(여섯 번째까지는 우리를 외면했다) 겨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로 되돌아와 여유를 되찾은 우리는 느긋하게 비프 부르기뇽과 해산물 빠이야를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게 황홀감을 안겼던 시장은 이미 철수한 모양인지 고가도로 아래는 전처럼 텅텅 비어있었다(아마 일요일에만 잠깐 열리는 시장인 것 같다). 원조 비프 부르기뇽은 시큼했고, 해산물 빠에야는 뜨거운 채로 장시간 테이크아웃 플라스틱 용기 안에 갇혀 있던 탓인지 수분이 많아져 촉촉하다 못해 축축했다. 둘 다 맛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이렇게 창문을 통해 멀리서 보는 에펠탑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구나!  



내일은 드디어 바로셀로나로 떠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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