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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니은 Jul 20. 2023

나의 결혼일지 01 - 결심에 관하여

나란 인간이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


인생 계획표 어느 한편에 결혼을 적어 놓기는 했으나 한동안은 내가 '결혼 부적격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1인 가구 이상의 공동체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샤워하고 나서도 샴푸 뚜껑을 열어놓는다거나, 온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는다던가-모친이나 부친에게 핀잔을 받아도 고칠 수 없었던 어떤 행동들-, 


퇴근 후에는 방문 밖을 나가지 않는 폐쇄적인 행동 역시 같이 사는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집에 오면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채로, 한 꺼풀씩 옷을 벗어던지고 반 벌거숭이가 되어 유튜브를 멍하니 보며 웃음과 기력을 되찾곤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이랑 좁은 공간에서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지 하는 생각도(신혼집은 트지 않은 베란다가 딸린 21평형이라 실평수는 그보다도 작다) ··· 루미큐브 같은 시간이 잘 가는 보드게임이라도 몇 개 구비해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리실력이 젬병이니 뭘 해 먹고살아야 하지-남편에게 뭘 차려줘야 하지-걱정했다(이런 걱정이 촌스럽다고 하기에는 남편이 식사를 차리는 우리 집 상황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으므로···충분히 걱정할 만한 사안이었다).



줄곧 모친이 락스로 번쩍이게 닦은 화장실을 쓰고, 모친이 빨고 다려준 옷을 입으며 한 집안이 어떻게 굴러가는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맘 편히 살아온 한낱 애송이에 불과한 내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서 밥상을 차리고 가끔 청소기를 돌리거나 화장대 위를 정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마무시한 세계가 열리고 있는데 나는 말 그대로 백지상태였다. 


집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지금껏 가족들에게만 보여줬던 날것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므로 두렵기까지 했다. 


어떤 결혼식을 만들 것인지 이것저것 구체적인 로망이 있었지만, 결혼식이 끝난 뒤의 생활에는 아무런 환상도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화려한 식장과 완벽하게 차려입은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까지 나오지, 

그 이후는 안 나오는 것처럼, 나는 결혼 이후의 생활을 마냥 아름답게만 그릴 수 없었다.


누렇게 뜬 민낯과 색 없는 입술을 보여줘야 하고, 말끔히 제거하지 못한 발 각질과 수분이 부족해서 갈라진 발뒤꿈치도 보여주고, 미처 치우지 못한 생리대를 들키고 마는(이건 정말 최악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연애할 때의 낭만과 설렘이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반전이지만 결혼을 한 지 9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 나는 누구를 만나던지 요즘의 유일한 낙은 남편이다, 결혼생활 너무 좋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이 이야기를 들은 결혼 3년 차 친구는 실소를 참지 못하며 '언니, 그거 눈 깜박하면 지나가.'라고 했고, 결혼 4년 차 아는 언니는 아기를 안고 '난 결혼생활을 할 만큼 한 것 같아 ···'라고 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생활이 지금 내 삶의 큰 낙이라고 세상에 퍼뜨리고 다닌다고 해서 환상이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내 속옷과 남편의 속옷이 엉켜 세탁기 안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고, 가끔 3일 정도 머리를 감지 않아 정수리가 바짝 눌려 있으며, 면도를 하지 않아 도깨비처럼 턱에 뾰족한 털을 달고 다니고, 치욕스럽게도 남편에게 진동 코털 제거기 사용을 권유받기도 했다. 


별생각 없이 결혼을 한 것치고 이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지인들로부터 많은 걱정을 샀다). 


앞으로 무슨 반전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러닝 셔츠에 속옷 바람의 남편을 계속 열심히 귀여워하기로 의지를 다시 다져본다. 남편을 귀여워하는 건 많은 상황에서 몹시 도움이 된다. 록 3년 후에는 나 역시 결혼 후배를 보며 쓸쓸히 미소 지을지라도, 그때는 그때의 다른 행복이 있을 줄로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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