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선크림 바르기
이렇게 얼굴이 벗겨져본 건 난생처음인데..
이마에서 나온 피부 껍질이라면 믿어지시나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아~ 마추픽추는 등산하는 곳이라던데~
얼굴 괜히 찝찝해지는 거 아니야?
그때 선크림을 꼭 꼭 발랐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찝찝해하지 말아야만 했다.
이걸 실제로 보다니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경이롭고 아주 멋진 자연이었지만
감탄은 30초 정도면 족하다. 새벽에 출발하는
투어일정이 고되고 무엇보다 더웠다.
더웠다는 것은 즉 햇빛이 쨍쨍 내리쬔다는 것
그리고 나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다는 것
장장 15시간 정도의 투어일정동안 덥고 힘들고
지치고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그럼에도
초록 풀숲, 파란 하늘, 드문드문 보이는 동물들,
옆에서 함께하는 사랑하는 남편 등
최대한 기분 좋은 것들만 생각하려 애쓰며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버스 타고 올라갔던 길을
내려오면서 와 나 정말 저질체력이구나도 깨달았다.
마추픽추 투어가 끝난 뒤 먹은 햄치즈 케이크와
시원한 맥주, 콜라는 꿀맛이었다. 초반에 엥?
그냥 밀키스인데?라고 천시했던 잉카콜라가
이보다 달콤하고 짜릿할 수 없었다.
햄치즈 케이크? 햄치즈 파이? 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느끼하고 짰다. 그럼에도 앉아서
마시고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이 들었다.
와 나 마추픽추를 보러 왔네? 보고 왔네?
대단하다. 비록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얼굴이 다 벗겨졌지만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르다. 나는 마추픽추를 보고 온 사람이 된 것이다.
절친한 친구가 마추픽추 관광을 보는 것을
추천하냐 묻느냐면 강력 추천까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곳까지 온 여행자라면
무조건 마추픽추를 보러 갈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마케팅의 힘인지, 이름이 주는 유명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마추픽추는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겠지. 나 같은 문화와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굳이 굳이 유명한 투어사에 웃돈 주고 예약해서 보고 왔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