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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천국을 위한 구덩이

지나온 관계, 스스로 판 구덩이를 돌아보며

by 백수안

누군가는 연애를 하는 때가 꼭 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지금이 좋다가도 누군가가 옆에 있길 꿈꾼다.


메리에게 누군가가 있었던 것처럼. 브리짓에게 다아시가, 세일러문의 세라에게 턱시도 가면이 있었던 것처럼. 기적적인 도움보다, 그저 존재 자체가 주는 감각이 나를 꿈꾸게 하고 설레게 만든다."


그러나 모두에게 완벽한 짝만 붙는게 아니라는 걸 안다.


사랑과 전쟁의 달달 볶는 못된 파트너의 모습들처럼, 이혼숙려캠프의 서로의 안전한 바운더리를 망가트리는 부부의 모습처럼, 안전한 내 공간을 부수는 모습도 상상해 보면 오히려 혼자와의 싸움을 외롭게 하는게 행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toxic한 관계는 매력적이지만, 평온한 때는 단비처럼 간간히 내릴 뿐이다. 지옥은 평범한 날을 천국으로 만들어준다. 천국에 갈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일상의 지옥구덩이를 파놓는다. 그 구덩이는 천국가는 길보다 쉽게 만들어진다. 일상의 고요함은 더이상 지루함이 아니다. 오히려 천국을 느끼게 하는 장치들로 설렘으로 다가온다. 행복은 별거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불행을 만들면 행복의 역치는 더 낮아진다. 숨쉬는 것 나혼자 있는 것 하루만 주어지는 미소 등에서 희망과 천국을 맛본다. 짧은 보통의 일상은 천국이 되고 긴 숨들은 지옥을 거닐 것이다. 짧은 천국을 위한 구덩이.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 세월, 독한 관계들은 내 일상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스스로를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벗어나 보니 일상이 지루하다. 평범하게 느껴지는 일상은 별로 행복하지 않다. 넘어질 구덩이가 사라지자, 남은 건 지루하고 고루한 긴 도로뿐이다. 남들처럼 날아가거나, 고급 차를 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다시 현재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나만의 지옥 셋팅을 시작한다


그렇게 오랜 쳇바퀴 돌듯 파놓은 구덩이들을 이제야 본다.


고루하고 지루한 일상을 걸어야 그나마 빨리 종점도 가고 다른 체험도 할 수 있다. 남보다 고속으로 가지 못하지만 그나마 앞으론 간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구덩이를 들어갔다가 짧게 나와서 한 곳에 오래 머물었는가.


메워버린 구덩이를 피해 앞으로 걸어간다. 나의 속도대로 간다면 언젠가 결국 도착할 것이다. 나만의 속도에 맞는 사이즈에 맞는 천국이. 지루하고 고루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끝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곳을 가기 위해 나는 오늘도 수련을 한다. 나만의 보통의 일상을 견디며 숨쉬어본다. 한숨이 아니다. 1초에 한번씩, 일상의 숨을 순다.




tempImagedKJnao.heic 탈출구, 2025, AHN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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