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한 조그마한 동네.
인도는 없고, 차도와 함께 걸어야 하는 도심 속 미개발 지구 같은 곳. 울산 중구, 동천이 흐르는 옆 '동동'이라는 이름의 동네는 우리의 무대였다. 부산에서 이사를 온 울산이라는 동네는 어린이를 찾아볼 순 없었다. 직업기술원 옆에 위치해, 집은 오로지 우리 집과 중풍을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는 주인할머니 집 이렇게 딱 두 채뿐이다. 집과 연결된 문 하나를 막아, 한 방은 세를 놓았다. 그 방에서 살던 세 달 남짓 살고 사라진 젊은 아저씨와 언니는 금단의 사랑으로 도망 다니는 동성동본 커플이었다. 엄마와 주인 할머니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듣긴 했지만, 그 뜻을 안 건 한참 뒤였다.
그런 황량한 골목은 우리의 공간이었다. 부산에서 보자기를 매며 함께 뛰어다닌 영웅 무리는 이제 없었다. 7살, 4살, 3살의 삼 남매만이 이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노란색 보자기, 파란색 보자기를 목에 매고 휘날리며, 우리는 뛰어다녔다.
우리 집 바로 앞엔 1m 남짓의 바위가 있었다. 지금은 쉽게 올랐겠지만 1미터 10센티미터의 첫째와 그 아래 동생들에겐 정복해야 할 높은 고지였다. 스파이더맨처럼 몸을 숙여 한 발, 한 팔을 조심스레 뻗어 올라가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먼저 올라간 사람은 막내를 끌고, 아래에선 막내의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바위는 알록달록해졌다.
망토를 휘날리며 놀던 우리는 심심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놀이를 발견했다. 바로 백조의 호수. 우리가 보았던 슈퍼맨의 날개와는 다른, 사악한 자의 매력에 금세 빠져들었다. ‘백조의 호수’에는 연약하고 멋진 왕자와 공주가 있었고 그들을 괴롭히는 로트바르트. 한 명은 필히 오데트 공주를 노리는 악당이어야 했다. 그 악당에겐 악마의 보자기가 필요했다.
우리의 얇고 반짝이는 보자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짙은 어둠을 표현하고자 보물 찾기를 시작했다. 엄마의 옷장까지 살피던 중 사악해 보이는 검정 융 드레스가 보였다. 지퍼를 끝까지 열어, 목에 감았다. 영락없는 마왕이 거울 너머 서 있었다.
우리 집은 금세 백조의 호수 속 왕궁이 되어버렸다. 가장 나이가 많은 첫째가 악마의 융드레스를 목에 매고 두꺼운 목소리로 흉내를 낸다.
"오데트는 내 것이다!! 으하하하."
사악하게 웃으면서 품에서 공주처럼 이불 드레스를 두른 채 눈을 감고 있는 3살짜리 남동생. 얘는 성별을 아직 구분 못하는 탓에, 누나들 사이에서 ‘언니’라고 부르며 자신도 여자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누나가 번쩍 안아 드는 것이 마냥 재미있다. 로트바르트는 오데트를 가볍게 들고 사악하게 도망을 가야 한다. 그래서 안간힘을 써 한 발씩 내딛는다. 그러다 그만, 어딘가에 걸리고 말았다. 찌익.
큰일이다. 놀이는 더 이상 없다. 왕자 공주 악당은 순간 사라지고 눈물에 잠긴 세 아이만 남았다. 드레스였던 촉촉한 천을 둘둘 말았다. 그 순간부터 슈퍼맨의 일상은 끝났다. 단지 동조자 셋만 남았다.
융드레스는 바로 다음날 합창단의 단원복이라는 것을 모른 채, 셋은 도원결의하듯, 새끼손가락을 굳게 건다. 그 비밀은 보자기처럼 얇았고 훤히 비췄다. 그날 밤, 3살의 막내는 엄마만 알아야 하는 비밀을 말하겠다며 씩 웃는다. 옆방까지 들리는 귓속말. 첫째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큰 달빛이 검고 긴 망토를 만들어주며 날아가라고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