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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Nov 06. 2018

어떤 시선

홍상수의 <풀잎들>

지난 일요일 저녁, 여느 때보다 더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대한극장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 <풀잎들>을 봤다. 제목이 풀잎들,이라니 퍽 귀엽다.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제목이다. 한데 제목에서 연상되는 청초함의 이미지와는 달리 극 전반에 깔린 정서의 무게가 썩 가볍지만은 않다.
 
영화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골목 안 작은 카페. 그곳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고 한 여자는 그들을 관찰하며 맥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무려 맥북이라니). 홍상수 감독의 전작 <그 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 '아름'은 카페 구석에서 엿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단상을 덧댄다.  

카페 안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근황을 묻고 전하며 서로를 탐색하던 이들은 이내 무겁고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처음 아름의 시선이 머무는 두 남녀의 대화부터 심상치 않다. 그들 사이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홍상수의 이번 영화에서는 유독 '죽음'을 소재로 한 대화가 두드러진다. 극 중 다섯 쌍 가운데 세 쌍의 대화에 죽음이라는 테마가 파고든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자장 안에 놓인 남녀는 서로를 책망하며 언쟁을 벌이고, 미수에 그친 자살 시도 이후 곤궁에 빠진 노배우는 살길을 도모한다. 어느 사내는 동료 교수의 죽음을 그의 연인 탓으로 돌리고 여자는 그런 책망에 "우리는 사랑한 것뿐"이라고 항변한다.  


아름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단상을 읊조리는 '내레이터'에 머물다가 남동생이 그의 연인을 소개해주는 자리로 옮겨간 순간 대화를 나눠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타인의 대화를 잠시 엿들은 것만으로 그들의 삶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깔보고 냉소하던 아름이 동생 커플 앞에서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혼하는 건 무책임하다며 독설을 쏟아낸다.


아름은 타인과 관계 맺기에 회의적이고 방어적인 듯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든 관계의 속사정을 꿰뚫을 줄 안다고 믿지만 그런 시선은 본질에 가 닿지 못하는 피상적 접근에 그칠 뿐이라는 걸 영화는 암시하는 듯하다. 관계 형성보다 거리 두기를 택하려는 아름을 향해 비겁하다고 하는 경수(정진영)와 지영(김새벽)의 지적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건 그런 맥락에서가 아닐까 싶다.
 
아름이 무리에 합류하는 결말부는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 장면은 함께 뿌리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풀잎들처럼, 냉소적인 시선을 거두고 한데 어우러지기를 원하는 감독의 바람이 투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인물을 담는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이 전작들에 비해 더욱 테크니컬하게 보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김민희의 히스테릭한 연기가 좋다.
++이유영의 처연한 눈빛, 잔상이 오래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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