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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pr 02. 2019

모두가 부통령의 사람들 - 영화 <바이스>


영화 <바이스>를 보기 전 예고편을 봤을 때 크리스천 베일이 분한 딕 체니와 샘 록웰이 연기하는 조지 부시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대선 주자로 나선 조지 부시는 딕 체니에게 러닝 메이트를 제안한다. 딕 체니는 본인이 석유 시추 회사 CEO이며 부통령직은 존재감이 없다며 빼는 듯하다가 군 통수권과 에너지 정책, 외교 정책 등의 권한을 달라고 역제안한다. 묵직한 톤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딜을 성사시키는 이 장면은 미국 정치 현실의 막전막후를 영화가 어떤 톤으로 그려냈는지 짐작 가능케 한다.


딕 체니는 미국의 제46대 부통령이다. 누가 미국 부통령에 주목할까 싶지만 딕 체니라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통령으로 알려진 딕 체니는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모두가 딕 체니의 사람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코드 인사로 권력을 장악한 그는 조지 부시 뒤에서 미국을 주물렀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연연했다면 딕 체니는 권력 그 자체를 추구했다. 권력의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집권 방식이었던 것이다. 아담 맥케이는 권력 실세였던 딕 체니에 주목한다.


영화 <바이스>는 딕 체니의 행적을 좇는다. 초반부에는 망나니 생활을 하던 딕 체니가 정신을 차리고 정계에 입문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여자친구 린 빈센트의 도움으로 예일대에 입학하지만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중퇴하고 고향인 와이오밍주로 돌아온다. 전선 설비공으로 일하면서 술에 찌들어 삶을 허비하던 딕 체니는 아내 린의 따끔한 일갈로 정신을 차리고 국회 인턴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때 만난 도널드 럼즈펠드는 체니의 정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럼즈펠드의 도움으로 백악관에 입성하여 최연소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다. 미국 석유 시추회사 핼리버튼 CEO로 지내며 한동안 정계를 떠난 그는 대권 주자로 나선 조지 W.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안을 수락한다. 자신의 측근들로 백악관을 채운 딕 체니는 국정 전반과 대외 정책에 관한 강력한 실권을 행사한다.  9·11 테러 후에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9·11 테러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딕 체니는 "위협으로 판단되는 항공기는 격추하라"고 지시한다. 순간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은 그러한 강경한 태도는 그가 정계에 입문한 뒤 백악관의 작은 집무실을 얻었을 때 보이던 순박함과 크게 대비된다. 무엇이 딕 체니의 삶의 태도를 바꿔 놓았을까. 망나니 시절 딕 체니를 바로 잡는 데 기여한 인물은 그의 아내 린 체니였다. 린은 남편을 통해 여성으로서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고, 딕 체니는 그녀의 채찍질로 자극을 받는다. 그는 정계에 입문하여 만난 럼즈펠드로부터 권력의 속성이 무엇인지 보게 된다. 럼즈펠드는 "우리의 신념은 무엇이냐"고 묻는 딕 체니의 면전에서 박장대소한다. 정치인에게 신념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걸 학습한 딕 체니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권력 그 자체만을 위해 나아간다.


영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채롭고 정밀하게 그려낸 전작 <빅쇼트>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연출 효과와 블랙 유머가 돋보인다. 딕 체니의 행적에 집중하며 미국 정치의 민낯을 드러내는데 그 방식을 조롱과 풍자에만 기대지는 않는다. 미국 정치의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딕 체니 역시 유약한 시절이 있었으며 한 가정의 자상한 아버지라는 점을 조명하며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둘째 딸 메리 체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안 뒤 동성애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갖게 되는 딕 체니의 모습이 단적인 예다. 또 하나, 상원의원 자리를 노리고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선 첫째 딸 리즈 체니가 폭스TV에 출연해 동성 결혼에 반대한다는 강경 발언을 하는 장면에선 권력욕이 어떤 식으로 대물림되고 진화하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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