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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ug 22. 2018

이토록 불온한 ‘빛’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죽음이란 의미가 내 삶에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 것인가,를 곱씹어 보게 된 건 아마 대학 시절 ‘상실의 시대’를 접한 이후였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 中


이런 잠언투의 문장은 지금 보면 매력이 덜하지만 당시에는 꽤 울림이 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탐미적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이나 영화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적어도 ‘환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 모른다.


남편과 사별한 뒤 새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남편은 왜 죽었을까. 누군가의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일은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러하듯 그 이유는 모호하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라는 새 남편 다미오의 말에서 희미하게나마 심정적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희미한 단서만큼이나 모호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빛이다. 어디엔가 가닿은 빛,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이들. 그 빛은 한순간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하면서 어떤 꿈을 꾸게 한다. 그 빛은 마음 한편에 자리한 헛된 희망이나 안도감, 죽음에 대한 충동 같은 것들을 비추기도 한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풍어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이 근방 어부 나부랭이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이라고, 아버님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다미도 가구도 빈틈없이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텐데도, 어쩐지 모습을 바꾼 낯선 방에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명이 다해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는 형광등을 보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듯한 안도감에 휩싸였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마 그때의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이 가슴 저리게 시리다. 그 멍한 시선이 이 소설집 전반의 정서를 이룬다. 그 시선이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 ‘꽃비처럼 흩날리는 밤벚꽃’, ‘늦가을 저물녘에 흩날리는 낙엽’, ‘아타미 바다 한가운데에 모여 있는 아침 해의 조각’ 같은 것들에 가닿을 때면 내 마음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린다. 그 잔상이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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