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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ug 22. 2018

‘우연’이라는 도화선

폴 오스터,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는 개인의 이야기를 거대한 서사로 풀어쓰는 능력이 탁월하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막다른 골목이나 궁지에 몰린다. 그 과정에서 우연적인 요소가 끊임없이 중첩되고 맞물리면서 이야기가 확장된다. 우연이 거듭될수록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개연성을 해치기 마련인데 폴 오스터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다가온다.


폴 오스터는 오히려 우연이라는 요소를 적극 끌어들여 특유의 문학 세계로 구축함으로써 독자를 홀린다. 이를테면 소설의 주인공 삭스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유의 여신상을 봤던 경험은 그의 일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가 출판한 단 한 권의 소설은 자유의 여신상 얘기로 채워져 있고, 자유의 여신상 건립 백 주년 기념일에 사고를 당하면서 그는 급격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이 투하된 날 태어난 탓에 곧잘 원자 폭탄에 대해 이야기하던 삭스는 생각지도 못한 테러리스트의 길로 들어서고 미국 전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을 하나하나 파괴하던 끝에 비극을 맞는다.


삭스가 자유의 여신상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뭘까.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곧 미국이 표방하는 모든 가치의 위선을 허물어뜨리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 감세를 내세운 레이건 시대 이후 미국 중산층은 붕괴되고 진보적 가치는 후퇴한다. 말하자면 '거대한 괴물'은 문학적 자만에 도취되어 있던 한 작가가 우연한 일을 계기로 미국의 정치사회적 지형을 바꾸려는 테러리스트로 변모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거대한 괴물』은 미국 현대사의 어느 시기를 관통하고 있으며 삭스라는 인물의 행동 변화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삭스는 헨리 데이빗 소로의 시민불복종 운동에 정치적 테러리즘을 결부시켜 행동에 나선다. 상대는 17세기 토마스 홉스가 절대적 권력의 통치권자로 상정한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의 권력을 정당화한 데 반해 삭스는 여기에 저항함으로써 그러한 관계의 전복을 꾀하고자 한다. 정의 구현에 나선 삭스의 시도는 얼마나 성취를 이뤘나. 그의 행동은 과연 합당한 당위성을 갖는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운명에 압도된 인물의 과잉된 자의식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흡입력이 상당하지만 다소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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