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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Mar 01. 2020

해질녘 가슴 내려앉는, 일상의 처연함

<82년생 김지영>(2019)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난 뒤 주인공 김지영을 연기한 배우 정유미의 공허한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좋은 장면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빨래가 돌아가는 세탁기 곁에서 넋을 놓은 듯 앉아 있는 지영의 모습이다. 지영의 텅 빈 표정은 어딘가 가슴 한구석의 불안감을 자극한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는 언뜻 평온한 일상의 한때를 비추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지영에게는 해 질 녘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짙은 허무에 사로잡히게 되는 공간이다. 무엇이 그토록 지영을 고립과 허무의 늪으로 밀어 넣은 것일까. 나로선 전업주부로서 육아와 살림에 매달려야 여성의 고단함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무리지만 스크린 속 지영의 처지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따름이다.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한국 남성의 시각은 불행히도 영화가 묘사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이를 갖는 순간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되는 여성의 처지를 당연시하고, 그렇게 사회에서 밀려난 여성을 향해 ‘맘충’이란 표현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결혼 후 여성이 밥상을 차리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시가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보는 남성의 인식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한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견고한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별다른 문제 인식 없이 아내를 ‘집사람’으로 칭하거나 아내가 집을 비우면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남자들, 시가 식구들과 아내 사이에서 눈치 없이 행동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후반부에서 지영은 카페에서 자신더러 ‘맘충’이라 수군대는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 각성에 이르기까지 지영은 멀기도 멀거니와 예사롭지 않은 길을 가야 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상처가 곪아 터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기가 이토록 힘들다는 것인지.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대다수 여성이 지영의 언니 은영(공민정)처럼 매 순간 할 말을 다하며 관습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지영의 캐릭터에 투영하여 보여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날개 꺾인 여성 캐릭터가 한없이 침잠하는 모습을 영화 내내 보기란 편치 않은 일이다. 영화든 문학이든 좀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그려지길 기대하는 입장에서 일정 부분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온전히 한국 여성의 현실을 말하는 영화가 우리 앞에 놓였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반길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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