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 펠뤼숑 '동물주의 선언'
7년 전 여름, 친구와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처음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나는 속으로 무척 긴장했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 뒤 처음 들른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냉면이었는지 막국수였는지 고민 끝에 고른 메뉴를 주문하며 계란과 고기를 빼고 달라고 말하는데 어찌나 눈치가 보이던지!(냉면이든 막국수든 국물이 있는 음식에 죄다 육수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당시 그 친구 앞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부터 고기를 일절 먹지 않겠노라고. 최초의 채식주의 선언인 셈이었다. 친구는 꽤나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그 친구 성격이 원래 그렇다). 비로소 한 고비를 넘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개인의 가치나 신념을 두고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식습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 그러다 보면 어쩌다 채식을 하게 됐는지부터 채식의 단계, 동물 학대와 착취의 현주소까지 대화 주제가 확장되곤 한다. 물론 분위기에 따라 얼버무리거나 두루뭉술하게 말할 때도 있다.
대화가 깊어지다 보면 상대편에서 질문 공세를 펴기 마련. 고기를 왜 안 먹느냐,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참느냐,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느냐, 동물은 불쌍하고 식물은 안 불쌍하냐 등등.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간혹 논쟁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끌고 가며 따지듯 캐묻는 이들도 있다.
그럴 때면 그때까지 읽었던 책이나 어디선가 접했던 강연, 다큐멘터리 등의 내용을 동원해 내 주장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껍고 장황한 이론서나 학술서 말고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확실한 지침서가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지난해 책공장더불어에서 출간된 코린 펠뤼숑의 <동물주의 선언>은 정확히 그런 부류의 책이다. 100여 쪽의 얇은 책이지만 우리가 왜 동물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러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짧고 굵게 보여주는 철학적・실천적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나온 그 어떤 책보다도 동물 문제의 정치화를 강하게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도축장 벽이 유리로 돼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 폴 매카트니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식육 생산의 실상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동물을 먹을 수 없으리라 믿었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 <옥자>를 통해 공장식 축산의 맨얼굴을 보고 난 뒤에도 곧 다시 치킨을 사 먹게 됐다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았나. <매트릭스>에서 동료를 배신한 사이퍼가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다시 매트릭스 속 허구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선택을 하듯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긴 하나 늘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의문이 존재했다. 왜 내 주변에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드물까? 동물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알고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문제 인식과 코린 펠뤼숑의 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동물의 윤리와 권리를 혁신하기 위한 지적 창조가 기여한 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동물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주된 어려움은 주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데서 발생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하거나 동물 문제를 정치적 핵심 분야로 부각시키는 일은 합리적 논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우리는 앞선 이들과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 (P.33)
“동물 문제의 정치화가 요구하는 것을 명확히 하기에 앞서, 수많은 동물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무수한 착취를 당하는 것 때문에 소비 습관을 바꾸는 사람은 매우 소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채식주의나 비거니즘을 선택하게 할 만큼 결정적이었던 것은 <동물해방>이 공리주의에 근거한 논증으로 동물 문제를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역사 문제로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P.35-36)
저자는 사회 변화를 이끄는 생각이나 사상이 지지를 얻는 데에는 시대적 흐름과 맥락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런 동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결집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동물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동물주의자는 물론 동물주의자가 아닌 사람들과도 한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연대하되 독선에 빠지지 말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독선적인 태도로 비난하는 행동은 역효과를 부를 뿐 아니라 그 대가 또한 동물이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독선적인 선은 자만심의 가면과도 같다”고 꼬집는다.
얼마 전 ‘동물당’ 창당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다. ‘동물 국회’와 같은 (동물에게 심히 모욕적인) 비유적 표현이나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동물의 권익을 의제로 삼는 동물당이 출현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밴드 ‘양반들’의 리더 전범선 씨는 최근 <한겨레> 칼럼(2020년 2월 28일 ‘동물당이 필요하다’)을 통해 동물당 창당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동물당은 말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말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정당이 태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선언 아닌가. 실제 창당 여부를 떠나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공존을 모색하는 시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움이 앞선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을 패러디한, <동물주의 선언>의 한 구절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모든 나라, 모든 정당, 모든 종교의 동물주의자는 집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