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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ug 22. 2018

하루키의 문장 비결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에세이는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상을 담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필치가 좋기 때문이다. 특히 『슬픈 외국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는 정말 즐겁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손에 꼽을 만한 에세이집이다. 하지만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한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와 거리를 둬 오다가 최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 들었던 팟캐스트의 영향이었으려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하루키의 삶과 창작에 임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하루키의 표현처럼 보통 사람들이 흔히 작가에 대해 품고 있는 '반세속적인 이상상理想像'의 이미지와 달리 하루키는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소설가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 지속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기초 체력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게 하루키의 답이다. 좀 더 실질적인 창작 비법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시시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 그러하듯 마음을 다잡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절로 반성모드에 돌입하여 이제부터라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며 의욕을 불태우게 하는 마력이 분명히 있다.


물론 하루키는 자기계발서에서 그러하듯 시간 관리의 비법이나 소설 창작 비법에 대해 설파하고 있지 않으며 책의 취지 또한 거기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하루키가 그동안 소설을 써온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가의 자질과 태도, 소설가의 삶에 대한 단상을 정리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하루키가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써왔다는 사실은 앞서 나온 다른 에세이나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려져 온 바이지만 하루키의 소설 쓰기, 소설가로서 삶에 대한 생각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뒤로 이런저런 고민에 머릿속이 산란한 상태라 그런지 몇몇 구절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특히 하루키가 첫 소설을 쓰던 시기에 자신만의 문체를 발견해낸 과정은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라 할 만한, 가히 혁명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나는 원고지와 만년필을 일단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만년필과 원고지가 눈앞에 있으면 아무래도 자세가 '문학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대신 붙박이장에 넣어두었던 올리베티 영자 타자기를 꺼냈습니다. 그걸로 소설의 첫 부분을 시험 삼아 영어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뭐든 좋으니 '평범하지 않은 것'을 해보자, 하고.(...) 그렇게 외국어로 글을 쓰는 효과의 재미를 '발견'하고 나름대로 문장의 리듬을 몸에 익히자 나는 영자 타자기를 붙박이장에 넣어버리고 다시 원고지와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영어로 쓴 한 장 분량의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했습니다. 번역이라고 해도 딱딱한 직역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식에 가깝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일본어 문체가 나타났습니다. 이건 나만의 독자적인 문체이기도 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발견한 문체입니다.(p.51)
이따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번역 투’라는 말이 들립니다. 번역 투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빗나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한 장 분량을 실제로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그 지적도 일리가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프로세스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내가 거기서 지향한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뉴트럴한neutral’, 활동성이 뛰어난 문체를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일본어다움을 희석시킨 일본어’ 문장 쓰기가 아니라 이른바 ‘소설 언어’ ‘순수문학 체제’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일본어를 채용해 나만의 자연스러운 음색으로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때의 나에게는 일본어란 단지 기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p.51~52)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하루씩 꾸준하게)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작업을 인내심을 갖고 꼬박꼬박 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말할 것도 없이 지속력입니다.(p.180)
그러면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기초 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p.181)
그럼에도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우선 이 달리는 습관은 끈질기게 유지했습니다. 삼십 년이라면 상당히 긴 세월입니다. 그만한 세월 동안 줄곧 한 가지 습관을 변함없이 유지하려면 역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달린다는 행위가 몇 가지 '내가 이번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상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략적인, 하지만 강력한 실감(체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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