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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ug 22. 2018

초현실과 무의식의 여정을 엿보다

앙드레 브르통, <나자>

『나자』를 왜 읽게 됐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시작은 볼라뇨다. 볼라뇨는 멕시코판 『플레이보이』와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다섯 권의 인생 소설을 꼽아 달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함께 언급했던 것 중 하나가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였다.


참고로 볼라뇨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멜빌의 『모비 딕』, 보르헤스 전집, 코르타사르의 『팔방놀이』,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 자크 바셰의 『전쟁의 편지들』, 알프레드 자리의 『위비 전집』,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심판』, G. C. 리히텐베르크의 『잠언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 리비우스의 『로마사』, 그리고 파스칼의 『팡세』 등을 좋아하는 작품들로 꼽았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시인이다. 브르통은 1924년부터 1942년 사이에 세 번에 걸쳐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볼라뇨가 주도한 '인프라레알리스모(infrarealismo)' 시 문학 운동은 바로 이 초현실주의(surrealismo)를 패러디한 것이다. 볼라뇨의 표현에 따르면 인프라레알리스모는 '멕시코판 다다'로, 문학 영역에서 이들 두 운동 모두 기존 질서의 전복을 꾀했다.


그래서 어쨌든 순전히 볼라뇨 때문에 『나자』를 읽게 됐다는 말이 이리도 길었다. 160쪽 남짓으로 분량도 얼마 안 되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브르통의 글쓰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근간으로 하며 순차적이고 선형적인 전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브르통은 무의식적 사고와 우연적 관점으로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에 의한 모든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유의 받아쓰기'를 통해 불완전한 이해 또는 기계론적 해석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작가는 소설 초반부에 이러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할애하고 있으며 어떤 소설적 전개 방식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밝혀두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것들은 어쩌면 통제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사건들로서, 완전히 예상과는 다르면서 거칠게 부수적으로 전개되는 성격과 그런 일들이 불러일으키는 믿기 어려운 관념의 결합으로, 가까운 곳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거미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거미줄에서 거미집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우아한 사물 쪽으로 당신을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엮어질 것이다.(p.19)
독자들은 이 분야에서 내가 경험하게 된 일에 대해 전체적인 설명을 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여기서 나는, 나만의 어떤 방식과도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때때로 나에게 일어난 사건과,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발생하여 내가 특별한 매력을 느끼거나 저항감을 느끼게 되어 그것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만든 것을 쉽게 떠올려 보는 일에 만족할 것이다. 미리 정해 놓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것을 내버려 두는 시간의 우연에 따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p.22)


소설은 브르통이 파리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나자라는 여성을 만나 얼마간 그녀와 함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브르통의 실제 체험이기도 하다. 작가가 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영감을 받아 소설로 재구성한 이야기인데, 팜므파탈 내지는 뮤즈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 여성 캐릭터는 물론, 그러한 이야기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중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조금씩 떨어졌다.


오히려 나자와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열거된 일련의 에피소드들, 특히 잠든 상태로 글을 쓰고 말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에 대한 묘사, 극장에서 본 「미친 여자들」이란 연극, 벼룩시장에서 만난 '파니 베즈노'와 나눈 대화 등이 꽤 흥미진진했다(덕분에 영매적 재능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로베르 데스노스의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무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삽화들을 어떻게 엮으려고 계속 나열하는 걸까 하는 호기심이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는 동력이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말미에 이르면 해소되지 않은 의문들에 결국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소설은 이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예외적으로 이번에만 격언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사실상 이런 질문은 모두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사로잡혀 있다'라는 말은, 어떤 존재들과 나 사이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특이하고 더 필연적이고 더 불안하게 만드는 관계를 맺게 한다는 점에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p.11)


줄거리만 보면 일종의 연애담을 다루는 듯하지만 결국 작가의 관심사는 무의식의 작용을 탐구해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 나자는 브르통의 자아에 파동을 일으킨 존재이자 대상이다. 나자를 만난 건 우연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만남이 이뤄지기까지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한 수많은 무의식적 작용이 뒤따랐다는 걸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게 유일하고도 실천적으로 확실한 영감을 주는 저 위대한 무의식의 생생한 목소리만이 언제까지나 나의 모든 자아를 좌지우지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자리에서 무의식에 새롭게 부여한 의미를 절대로 취소하지 않겠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무의식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싶고, 무의식만을 믿고 싶고, 내 눈 속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빛의 한 점, 그 어둠의 덩어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주는 빛의 한 점을 내 스스로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의식의 드넓은 방파제를 한가로이 거닐고 싶다.(p.158-160)
아름다움은 리옹 역에서 끊임없이 급격하게 덜컹거리면서, 내가 알기로는 출발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출발하지 않을 기차와 같습니다.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는 그러한 급격하고 불규칙한 움직임들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이 움직임들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된 하나의 발작적인 충격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p.164)  


뮤즈와 같은 존재에 사로잡힌 한 작가의 내적 변화와 흐름을 초현실주의적 문학 기법을 동원해 보여주는 방식이 과시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러한 기법을 차용한 몇몇 작가와 작품들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일련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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