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세묵 참페이의 영롱한 물빛
안티구아에서 랑킨으로 향했다. 랑킨은 순전히 세묵 참페이(Semuc Champey)를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도로 사정은 워낙 열악하여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랑킨에서 세묵 참페이 인근 숙소까지 픽업트럭을 타고 갔다. 트럭에 가축처럼 실려 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세묵 참페이는 마야어로 ‘성스러운 물’이란 뜻을 지녔는데 터키 블루 색을 띠는 계단식 강이다. 과테말라에서 놓쳐서는 안 될 절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나보다 앞서 1년 동안 중남미 여행을 했던 한 친구가 과테말라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터라 호기심이 일었던 곳인데,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과연 이 정도까지 고생을 해 가며 꼭 가야만 하는 곳인가 하는 회의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숙소는 까본 강(Rio Cahabon)을 끼고 있는 숲속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랑킨이 아니라 세묵 참페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내가 있는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 엉뚱한 질문만 해댔던 것이었다.
호텔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와이파이조차 터지지 않고 온갖 벌레와 모기로 가득한 숙소에 있다 보니 원시문명 체험을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작은 숙소에 백인 여행자들이 우글우글하여 정신이 없는 데다 탁 트인 식당 테라스는 밤이면 펍 분위기로 변하는 곳이어서 조용히 머물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랑킨에 온 다음날, 세묵 참페이에 갈 채비를 했다. 숙소에서 3.5km 거리에 있다고 직원이 말해 주었다. 숙소에서 셔틀을 제공하긴 하지만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수영복과 숙소 직원이 준 지도를 챙기고 혼자 길을 나섰다. 쿠오오, 소리를 내며 흐르는 까본 강을 끼고 숲길을 걸었다. 비가 자주 와서인지 강은 온통 황톳빛이었다.
가는 길에 동행인이 생겼다. 마리오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는데 나보다 꽤 어려 보였다. 세묵 참페이 근처에서 맥주를 판다고 했다. 그는 물이 가득 담긴 페트병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얼음물이라며 마시겠냐고 내게 들이밀었다. 돈을 받겠다는 심산으로 보여 거절했다. 마리오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평범한 길을 두고 억센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이 지름길이라며 성큼성큼 가로질러 갔다. 멀리 돌아가야 할 길을 단숨에 질러 갈 수 있었다. 마리오는 얼마 안 가 또 내게 물었다. "이리로 가면 더 가까운데 가겠어?" 나는 좋다고 했다. 다시 내 키만 한 풀이 나 있는 길을 가로질렀다. 축지법을 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나에게 물과 맥주를 팔려고 한다. 나는 필요 없다고 거듭 말했다.
세묵 참페이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리오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 아이가 대뜸 내 이름을 물으며 친한 척을 했다. 자기 이름은 로날드라며 맥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중에 마시겠다고 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먹을 것을 파는 아이들이 많아 보였다. 장사하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나선 아이들이 호객 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행자들을 태운 셔틀 차가 정차하자 초콜릿을 팔려는 아이들이 차 주변을 에워쌌다. 발성과 손짓, 몸짓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락없는 장사꾼의 모습이었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걷다 보니 세묵 참페이의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수정 같은 색감이 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마구 부추겼다. 충동을 억누르고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는데 예상보다 힘들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셔츠가 땀에 흠뻑 젖었다. 물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전망대에 올라 세묵 참페이 주변을 조감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적당한 위치를 찾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그 푸른 물에 몸을 담갔다. 강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했다. 묘한 색감과 주변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천혜의 자연을 소유한 이곳 사람들의 눈에는 어떤 식으로 비칠지 궁금했다.
문득 물속을 휘적휘적 걷는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네 수영장조차 가지 않는 내가 먼 나라에서 혼자 수영복을 입고 물속을 거닐고 있는 모습은 스스로도 어색하고 쑥스럽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나처럼 관광객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지점을 선택한 두 남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내게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대뜸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말을 했다. 안티구아에서 왔다는, 배 나온 이 남자에게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친구와 함께 다이빙하는 모습을 서로의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주고 있었다. 나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다이빙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타이밍을 자꾸 놓치는 바람에 몇 번을 반복해야 했고,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 있었다. 잠시 후 인사를 나눈 뒤 그곳을 벗어났다.
입구 근처로 되돌아왔을 때 로날드가 다가와 또 친한 척을 했다. 마리오 앞으로 가 맥주 한 캔을 샀다. 의리상 마리오에게 맥주를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옆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경쟁적으로 초콜릿을 들이밀었다. 두 개에 10께찰씩 팔았다. 그중 한 아이의 것을 얼떨결에 손에 쥐었더니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이도 초콜릿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으니 마리오가 중재에 나섰고 그가 두 아이에게서 초콜릿을 하나씩 집어 나에게 주었다. 은박지로 얇게 포장한 초콜릿은 더위에 녹아 끈적였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집 앞에서 놀고 있던 꼬마 둘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수줍게 웃으며 올라,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미소가 무척 해맑았다. 어쩌면 이토록 천진난만할까. 조금 전 초콜릿을 팔던 아이들의 영악한 미소와 대비되어 그 간극을 잠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