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택
내가 알고 있는 나는 타인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제안했을 때 거절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내 감정과 상황을 고려해서 그 일이 가능한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을 수월하게 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모임이 있기 전까지.
출산 전(코로나가 심해지기 전), 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문화예술 관련 모임에 멤버로 들어갔다. 문화기획으로 진로를 변경하면서 퇴사를 하고 출산을 해도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재취업을 원했고, 내가 속한 지역에서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면 좋을 것 같았다.
아직 입덧이 다 끝나지 않았고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게 힘들었던 임신 4개월 차. 그 모임에서 공모사업을 위해 기획서를 쓰기 위해 팀을 꾸린다고 했다. 보수를 받는 건 아니었지만 내 경력을 좋게 평가해준 분들이 계셨고, 내가 하면 잘할 거라는 칭찬을 해주신 것과 경력을 잇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하겠다고 말을 했다.
몸이 힘든데도 기획서 회의와 작성 등을 몇 주동안 해나갔다.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까지 하고 마무리 짓자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걱정했다. 밤 10시가 돼서 제안서를 수정, 검토 후 메인 담당자에게 넘겨주었다. 힘들지만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지 못했던 건 지금에서 보면 책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를 위한 책임감의 비중보다 남을 위한 책임감이 더 크지 않았을까.
다음에는 상황이 무리가 된다면 판단을 해서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그러지 못한 나를 최근에 발견했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운영되지 않다가 몇 개월 전부터 다시 운영이 되었다. 멤버들 간의 교류가 생기고 만남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참여를 하고 있지 않다가 모임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랜만에 다시 모임에 참여하고 싶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였지만, 어떤 것들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모임 장소에 가게 되었다.
멤버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나눠지면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나 또한 그 의견을 제안했다. 그걸 듣고 있던 한 분이 나에게 해 오신 경험도 있고 잘하실 것 같은데 다른 분과 함께 채널을 만드는 걸 하면 어떻겠냐고 말씀 주셨다.
순간 나는 '지금은 안되는데... 아직 가정보육과 내가 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걸 하기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채널을 만들면 계속 운영자로서 활동할 수도 있는데 가능할까?. 오랜만에 모임에 구경하듯 온 건데 갑자기 이런 책임을 맡는 게 부담스러운데.' 등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나의 머리는 내 입과 엇박자를 냈다.
'네, 한번 해볼게요' 아뿔싸.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나한테 이러한 형태들의 업무가 오는 건 내가 잘할 수 있고, 향후 유사한 일들이 나의 밥벌이가 되어 주지 않을까, 부담되지만 한편으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라며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다독였다.
모임 중간에 나의 부담감을 피력하긴 했다. 하지만 부담 가질 필요 없이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티타임이 있는 내 감정은 불편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집에 와서 불쑥불쑥 생각이 들어서 한숨을 쉬었고 남편에게 고민을 꺼내놓았다.
남편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현실적인 상황들을 볼 때 가능한지도 판단하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다시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고민의 밤이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나를 타박하기도 했다. '거절을 못해서 너 자신을 힘들게 하니'. 다시 그 상황 속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이미 내 마음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표면적으로는 아직 그 모임의 애착이 형성되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일을 맡아서 하는 게 나에게는 변수였다. 가정 보육이랑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 있기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거였다. 사실, 내 마음이 움직일 만큼 그 일을 해야하는 이유가 없었고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절을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같이 하기로 했던 멤버에게 내 사정을 말하고 그만두는 말을 하는 게 어려웠다. 나의 감정과 상황보다는 타인이 어떻게 나를 받아들일까 하는 우려감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잠시 뒤로 하고 계속하는 게 나을까 고민했다.
고민과 고민 끝에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 거절하는 것으로.
다음 날, 멤버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나의 생각을 전달하면서 채널 구축에 전반적인 방향을 제안해주었다. 전화를 하는 동안 거절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힘들었기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감사했던 것은 내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해주셨다.
살다 보면 물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었나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금쪽같은 상담소, 미자 편>에서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평가가 곧 나 자신이 되어버렸기에 내가 거절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를 향해 기대에 찬 눈들을 보며 '나는 아직 참여하기 이릅니다'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이 모임으로 내 생각만큼 거절을 수월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절을 하려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짚어보게 되었고 거절에는 'Yes와 No' 외에 '보류'라는 카드가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게 된다면 경험한 일을 떠올리며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