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겨울

9와 숫자들 '유예' 노래소설

by 강민영

-을지로입구역에서 만나면 어때요?


약속을 먼저 변경하자고 한 것은 서현이었다. 소개팅을 하면 세 번 이상 누군가를 진득하게 만난 적이 없는 서현에게 경수는 의외의 사람이었고, 이번에야 말로 경수 같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서현은 큰맘 먹고 요즘 광화문에서 그렇게 난리라는 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몇 주 전 예약전화를 넣었다. 1인당 주말 저녁 코스 가격은 부가세를 포함해 9만 원 정도로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경수에게 '나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호의를 표현하고 싶었다. 통장잔고를 생각하면 객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다음 달만 조금 긴축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급히 불편한 마음을 지웠다. 그마저도 자리가 없어 원하는 날짜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려면 열흘을 기다려야 했으나 서현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경수를 만나는 데 당연히 따라붙는 부대비용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을지로입구역 좋아요. 그러면 5번 출구에서 만나요.


하지만 경수와의 저녁을 약속했던 날 집을 나서자마자, 서현은 결코 오늘 꿈에 그리던 그 비싼 프렌치 레스토랑에 당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모든 열차의 모든 칸들이 무수한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 상태를 자랑하고 있었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버스는 운행중단과 우회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당일 취소에는 위약금을 물어야 했지만 서현은 어쩔 수 없이 저녁 예약을 취소해야 함을 경수에게 알렸고, 경수는 어차피 두 사람 모두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으니 광화문 근처의 다른 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떨까를 제시했다. 두 사람은 일단 을지로에서 만나 그다음 일정을 생각하기로 했다.


"오래 기다렸죠? 사람이 정말 너무 많네요."


먼저 와 있던 경수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서현이 말했다. 아침만 해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장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쑥하고 깔끔히 정돈된 격식의 복장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동시에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경수와 서현 둘을 제외하고 을지로입구 역을 스쳐가는 무수한 사람들은 모두 까만색 패딩에 두터운 털모자, 편한 운동화와 두툼한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지로입구역에서 광화문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람의 파도 속에서, 서현과 경수는 서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람들의 손에는 일제히 '박근혜 탄핵'이라는 글자가 크게 써져 있는 피켓이 들려 있었다. 경수는 그들 중 누군가가 흘리고 간 빨간색 피켓 한 장을 들고 서현에게 말했다.


"오늘이 이 날인 줄 몰랐어요. 우리 되게 다른 세상의 사람 같네요, 여기에선."


서현은 경수가 건네주는 피켓을 앞뒤로 돌려보며 유심히 문구를 읽었다. '국민의 힘으로 심판', '박근혜 탄핵'. 서현의 오른쪽에서 서현을 살짝 밀치며 지나가던 사람은 서현이 들고 있는 문구와 똑같은 문구의 피켓을 몇 장 떨어뜨리며 지나갔고, 서현은 그 사람이 흘린 피켓을 주워 경수에게 건넸다.


"다른 사람인 것은 맞네요, 우리 복장이. 우리가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에서도 저쪽 광화문 광장이 잘 보였을까요?"


경수는 서현의 손에 들린 피켓을 받아 들었다. 앞뒤 할 것 없이 많은 인파가 여전히 광화문을 향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손에 들고 있던 피켓의 부피를 이기지 못해 피켓들을 몇 장씩 흘리며 행진을 시작했다. 경수는 그들의 뒤를 좇아가며 앞사람들이 흘리고 간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고 서현도 얼떨결에 경수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손은 금세 '박근혜 탄핵'이 쓰인 피켓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피켓들을 안고 가만히 한 자리에 서있는 경수와 서현을 지나가며, 더러는 서현과 경수에게 피켓을 빼앗듯이 받아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우리도 같은 세상의 사람이 되었네요."


서현은 말을 이었다.


"혹시나 그 레스토랑 다시 가볼까 했는데, 그래도 그쪽에서 저녁 먹는 건 포기해야겠어요. 정말 제가 맛있는 저녁 사드리고 싶었는데. 되게 오래 기다렸는데. 경수 씨랑 가고 싶었는데."


서현은 자신의 주변에서 울리는 함성소리를 들으며, 빠른 호흡으로 경수에게 말했다. 경수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 것 같아 아차 싶으면서도,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화문 한 복판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라고 작게 위안을 가졌다.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너무 짜증을 부린 걸까, 경수가 나를 너무 철없게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많은 고민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굴리는 서현의 얼굴은 금세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현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에 취한 느낌이 들었고, 경수는 그런 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현의 귓가에서 서현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하는지 잘 안 들려요, 서현 씨. 근데 저는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데요."


박근혜를, 탄핵하라! 박근혜는, 물러나라! 끊임없이 몰아치는 일정한 구호와 함성 소리 속에 서현은 경수의 목소리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고, 경수의 목소리가 그 어떤 소음과 외침보다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경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래요, 진짠데. 경수의 목소리는 곧 군중에 묻혔지만 서현은 경수의 입모양만으로 경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서현과 경수는 빨간색과 노란색 글씨가 섞여있는 빳빳한 재질의 피켓들을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걷는다'라고 의식하지 않고 그저 몸을 맡기고 있어도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행렬 속으로 경수와 서현은 발을 옮겼다. 이따금씩 몸뚱이를 부딪히는 사람들이 내는 구호들, 부딪힌 사람들끼리 서로 죄송하다, 괜찮으세요 크고 작게 인사 나누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일주일 전이나 몇 주 전,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주말의 오후에도 서현은 광화문을 찾았다. 서현은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문구의 피켓을 들고 지금과는 다른 복장으로 온몸을 칭칭 동여매고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오늘이 처음 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경수에게 하고 싶었지만 크고 작은 사람들의 소음과 높고 낮은 사람들의 감정 속에 그 말을 삼켰다. 서현이 광화문에 있었던 순간들에 경수도 광화문 어딘가에서 청와대 언저리를 바라보며 소리를 보태고 있었지만, 그 수 천 수 백의 인파와 검은 패딩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았을 리 없었다.


얼추 생각해도 몇 만은 모였을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견뎌내기 위해, 경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서현은 그 손을 꽉 잡았다. 서현은 이 손길이 자신에 대한 호감의 표현인지 아니면 함께 겪고 있는 이 상황에서 기인한 동지애의 표출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경수가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곧 경수를 잃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현은 무의식적으로 경수의 손을 꽉 잡았다. 경수의 손을 잡자마자 서현의 손에 들고 있던 피켓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경수와 서현 두 사람 모두 허리를 숙여 그 피켓의 종이들을 주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서현이 경수의 손을 잡자마자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던 행렬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시청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줄기에서 분열된 또 다른 행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몇몇의 사람들은 우왕좌왕했지만 모두들 금방 정신을 차리는 분위기였다. 하마터면 어깨를 부딪힐 뻔한 경수와 서현은 어색하게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시청과 서대문을 돌고 다시 광화문으로 온대요. 경수와 서현이 새로 합류한 대열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이 줄기가 향하는 방향을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서현과 경수는 한 손은 서로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최초에 주워 든 피켓을 꼭 붙들고 원래부터 이 집회를 위해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처럼 무리 속에 자리를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열흘을 기다린 그 프렌치 레스토랑은 분명히 9만 원 돈과 비등하지 못한 퀄리티의 음식을 내 왔을 것이다. 서현은 수많은 인파 사이에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걸어가는 경수의 옆모습을 보며, 이건 9만 원과 열흘이 아니라 99만 원과 1년을 내어 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이상하고 두근거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오른쪽에서 차가운 생수를 건네 왔고, 서현은 그 생수를 받아 경수에게 건넸다. 따듯한 봄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진 기분이었다.


https://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36241&trackId=3359131


매거진의 이전글롱이어비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