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눈물바람' 노래 소설
-내가 언젠가 사라진다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곳은 딱 한 군데뿐일 거야.
-그게 어딘데?
-롱이어비엔.
진은 얼마 전에 서점에서 산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말했다.
-노르웨이 북쪽에 스피츠베르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안의 롱이어비엔 마을에는 사람이 죽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대. 말하자면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죽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진은 세계지도에서 노르웨이 부근을 네모나게 주욱 찢어, 돋보기로 세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봐 봤자 자세한 건 안 나오지 않아? 그럴 거면 노르웨이 지도를 사지 그랬어.
진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핀잔주는 나에게, 진은 투덜대며 말을 붙였다.
-노르웨이 지도만 사면 재미없잖아. 나는 여어기 한국에 있는데, 한국에서 노르웨이의 롱이어비엔이 얼마나 먼 길인지 그런 지도를 사면 모르잖아. 그래야 사람들이 내가 없어지면 그래, 먼 곳을 갔구나, 이번에는 정말 작정해서 사라졌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막 베이징이나 도쿄에 갔다고 쳐 봐, 그러면 아 베이징이랑 도쿄, 놀러 갔구나 하겠지. 신비감이 없지 않겠냐고. 그건 노르웨이 지도만으론 알 수 없는 거잖아, 얼마나 먼 지.
진은 깔고 앉았던 세계지도를 다시 펄럭거리며 편 뒤,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의 거리를 손바닥으로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한 뼘 두 뼘, 세 뼘을 넘기고도 아직 모자란 노르웨이까지의 거리를 보며, 나는 정말로 노르웨이가 그렇게 먼 곳인지 아니면 진이 서점에서 산 지도가 단순히 그냥 실제보다 큼지막하게 제작된 것인지 궁금했다.
-너 얼마 전 까지는 인도 북부의 뭐, 레?라는 마을에 갈 거라며?
-후보군을 두는 거지. 한 곳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다가 훌쩍, 진짜로 떠나게 되면 나를 찾는 사람들은 수수께끼 찾듯 내가 후보군으로 나열한 곳을 뒤질 것 아니야. 기억해줄 사람이 많다면 좋겠지만, 없다면 한 사람이 세계여행을 하게 되겠지. 한 사람은 레, 한 사람은 페루, 한 사람은 노르웨이로 그렇게 세계여행을 떠나게 되는 거야.
진은 틈 날 때마다 자신이 훌쩍 사라진다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곳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의 목록은 계절을 타지 않았으며 어떤 대륙에 국한되지도 않았지만 대체로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도시들이었다. 언젠가 진에게 그 많은 나라를 다 가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걸 그저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구글 지도를 크게 펼쳐두고 사람들이 가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본다고, 그러다보먄 특이하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도시가 눈에 보여, 그 도시들을 늘어놓고 하나씩 도시의 영문명으로 검색해 정보를 얻은 후 최종적인 후보를 가린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막연하게 도시를 찾아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꽤 디테일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보를 모으고 있는 진을 보며, 그럴 에너지를 다른데 쏟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핀잔을 주곤 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은 그저 그 후보군을 모으는 걸 좋아했고, 살아생전 연이 닿지 않을 것 같은 나라와 도시들을 둘러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진에게 사라진다는 건 뭘까. 죽고 싶은 곳을 말하는 건가. 죽고 싶은 곳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적어도 한국을 벗어나서 죽고 싶다는 걸까.
진은 그렇게 여덟 개의 후보군을 정해놓고 정말 홀연히 사라졌다. 부산에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차피 저녁이면 얼굴을 맞대고 하루를 이야기하며 밤이면 같은 침대에 누워 그날의 수다를 떨었기에 하루 종일 자주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1년에 한 번 있는 부산 출장을 가면서도 일이 워낙 고되고 힘들어 사흘 동안 진에게 연락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매년 있는 출장이니 예년과 똑같이 남포동의 떡집에서 진이 좋아하는 찹쌀떡을 사서 기차와 지하철에서 내린 후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었는데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들었고, 그 싸한 느낌이 곧 진의 흔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바닥에 찹쌀떡을 내려놓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반쯤 비어버린 집안을 바라보았다. 진은 자신의 물건만 골라서,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 나 밖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정리한 채 사라졌다. 매 년 내가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진은 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걸까. 항상 떠날 생각을 했다면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온 집안을 다 뒤져 진의 편지나 쪽지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진의 메모를 찾느라 난장판이 된 집안 가운데 곱게 바닥에 앉아 있는 남포동 찹쌀떡이 괜히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떡 상자의 포장을 뜯어 찹쌀떡을 와구와구 씹어 삼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진은 늘 이야기했던 그 후보군 중 한 곳으로 떠난 걸까. 지금에라도 실종신고를 하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제 스스로 떠난 사람을 경찰이 도와주진 않을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찾으러 가야 하는 건가. 당장 다음 주부터 휴가계를 제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여덟 도시 중 한 곳을 골라 간다고 해도 그곳에 진이 있을 것이란 확률이 없다. 그녀가 가장 마지막에 말했던 롱이어비엔으로 가야 하는 걸까.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고 가슴 한켠이 쨍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진이 사라졌다. 나의 일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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