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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영 Mar 15. 2019

<시>(2010)

 


<시는> 기다림의 영화다. 미자(윤정희)는 끊임없이 시상을 찾아 헤매고, 자신이 시를 쓸 수 있게 되기를, 자신에게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녀에게 시는 다가가기 어려운 고귀한 대상이다. 누군가 시를 모욕했을 때, 미자는 파르르 떨며 그를 경멸한다. 영화 속에서 '시'는 넘치는 화두다. 어떤 시인은 시가 어렵다 하지 않고, 어떤 시인은 시 따위 집어 치라고 말한다. 시 낭송회의 사람들은 아주 쉽게 선 자리에서 시를 읽어 내린다. 문화원에서 시 창작 강습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 더러는 시를 몇 번 써보기도 했다. 그들은 미자와 다르다. 미자는 그들을 우러러보기만 할 뿐 자신에게는 언제쯤 그런 찬란함이 다가올지 마냥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찬란한 시의 순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미자다.  


 미자는 시를 남기고 떠난다. 미자가 시를 갈망하는 것처럼, 미자가 계속해서 수첩에 사물을 통해 연상되는 시상을 적어 내려가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이름이 타인에게 불려지기를 갈망한다. 미자는 '미자'라는 음절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녀를 '미자'로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전한 이름으로서, '미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결국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사라진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그녀의 손으로 쓴 시가 내려앉는다. 미자의 목소리가 죽은 여중생 희진의 목소리로 오버랩되기 직전, 미자가 머물던 빈자리를 조용히 보여주는 <시>의 마지막 시퀀스는, 불려지지 못한 '미자'의 이름, 두 음절이 비로소 발화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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