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 2교 윤중로 방향

9와 숫자들 '그대만 보였네' 노래 소설

by 강민영

가만 보자 뒷번호 6794... 네 안녕하세요, 제가 맞아요. 네 방금 전화주신, 여의도 국회 방향 그거요. 그러니까 너무 날이 좋아서 걸어볼까 하다가 바람이 무지막지하게 불어서 불렀는데 딱 매칭이 돼서 이렇게 빨리 잡혔네요. 요즘 택시들은 가까운데 일부러 승차거부하고 그러잖아요. 고작 몇 키로라고 하더라도 택시를 타는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그래서 이 어플 쓴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주 만족 중이에요. 금방금방 택시가 잡히고 또 승차거부도 안 되게 되어 있다면서요. 저 같은 소비자야 콜이 들어오고 빠져나가고 하는 그런 로직까지야 자세하게 모르지만, 어쨌든 한 번도 승차거부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만족하고 사용하고 있달까요.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갈 때면 항상 그런 거리는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아 못 간다는 말을 듣고 있어서 어찌나 부아가 치밀던지. 처음 탈 때 쿠폰 만원 주는 것도 너무 좋아요. 차도 크고 쾌적하고 전부 새 차에 관리도 잘 된 것 같고. 뭐 자세한 상황은 저야 모르지만요.

네 맞아요. 거기예요, 윤중로 들어가는 입구. 사실 말이 윤중로 입구지 그냥 어디 내려주신다고 해도 윤중로에 다 왔구나 생각할 거예요. 저는 이번이 서울 온 지 네 번째예요. 그 네 번을 전부 이 서비스를 이용해서 만족하고 쓰고 있지만 어쨌거나 저는 지방에 살고 있거든요. 지방에서는 아직 이 서비스가 돌아가지 않는단 말이죠. 서울의 특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울 지리가 어두운 편이라 아주 먼 거리만 아니면 대중교통보다 택시를 이용하고 있는데 택시 기본요금도 차이가 난다는 것은 얼마 전에 깨달았어요. 사실 이 서비스는 기본요금이랑 상관없이 좀 비싼 가격이니까요.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그 정도 가격은 감수하고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쾌적하다는 거죠. 이렇게 꽃이 만개한 봄에, 이 정도 거리에서 여의도로 가자고 하면 백이면 백 승차 거부할 거라고 수진 씨가 그랬거든요.


아, 수진 씨요. 얼마 전에 대학교 동기의 소개로 만났어요. 소개팅 아니고 소개. 저는 사실 대학교 때나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나 소개팅이라는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물며 그 흔하다는 미팅 한 번 한 적 없으니까 말 다했죠. 그렇다고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많이 한 편도 아니고 적게 한 편도 아니고 그냥 다들 남들 할 정도로만 했어요. 학창 시절엔 남중 남고를 나와서 연애라는 단어의 ㅇ자도 모르고 지냈고 제 이상형은 텔레비전이나 광고에 자주 등장하던 전지현, 손예진, 고소영 정도를 웃돌면서 눈만 높아진 것 같아요. 취향이 너무 올드한 편 아니냐고요? 제가 좀 동안 소리를 많이 듣긴 하는데, 저 이래 봬도 삼십 대 후반인걸요. 아니 그리고, 솔직히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이런 영화는 지금 봐도 명작이잖아요. 그때 외모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언제든 꺼내보고 싶을 만큼 여주인공의 미모가 너무 예쁘잖아요. 그런 영화들이 몇 편 더 있는데. 보자, <8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렇고요, <번지점프를 하다>, <봄날은 간다> 전부 다 제 취향의 영화들이에요. <연애소설>도요.


맞다, 수진 씨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저는 원래 그냥 주변에서 누굴 알고 지내다 호감이 생기고 그게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뀌고 뭐 그런 자연스러운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다만 요즘엔 사람을 통 만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감정도 별로 안 생기고 그저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갔던 대학교 동창 모임에서 수진 씨를 처음 만났어요. 이렇게 딱, 마주해서 만난 건 아니고 아까 말씀드렸던 그 동기 있죠, 그 동기의 친구였거든요, 수진 씨가. 같은 과를 졸업했다기에 나는 수진 씨 같은 사람이 과에 있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제야 동기 녀석이 복수전공이었다는 걸 깨달았지 뭐예요. 저랑 그 동기는 정치외교 전공, 수진 씨는 국문학과 전공. 평소에 문학소년이니 뭐니 너스레를 떨던 동기의 학창 시절이 새삼스레 생각나고, 그때 국문과 수업을 간댔나 문창과 수업을 간댔나 아무튼 두꺼운 장편소설을 한 주에 하나씩은 해치우던 동기의 모습이 어렴풋 떠오르더라고요. 동기 친구와 수진 씨는 아마 그때 즈음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 알고 지내고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어요. 뭐 동기도 그 뒤로는 군대니 취직이니 생업에 바빠 문학과는 완전 담을 쌓고 지냈다고 하고 수진 씨도 전공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고 있으니 대학교 시절 일들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시간이 흘러 동기를 통해 수진 씨를 만났다는 사실만이 감사할 다름이에요, 저는.


처음 수진 씨를 봤을 때 단번에 사랑에 빠지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동기의 여자사람친구 정도구나 생각했죠, 동기도 수진 씨를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감명 깊게 보았던 한국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수진 씨가 먼저 <번지점프를 하다> 이야기를 꺼냈어요. 네, 아까 말씀드린 그 영화 중 하나요. 그 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연기했던 고 이은주 배우가 수진 씨가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자신만의 베스트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때야 머리를 띵 하고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은주 배우의 베스트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영화 중 하나고, 그 영화에 나오는 비 오는 장면은 모든 영화를 총망라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고요. <번지점프를 하다>를 단순 로맨스 영화로만 치부하면 안 돼요. 사랑, 환생 이런 철학적 주제를 뛰어넘는 무언가 끈끈하고 아련한 유대의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수진 씨가 어쩜 자기가 하려던 이야기를 이렇게 머리를 스캔해서 출력해낸 것처럼 똑같이 하냐고 신기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순간 아, 나 이 사람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캔이니 출력이니 뭐 그런 표현이 신선해서 그 자리에서 크게 웃고 말았는데 뭐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 자리에서 저희 둘이 핸드폰을 들고 왓챠-영화 추천 어플이에요-를 열어 영화 목록을 대조해보기 시작했어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알아요? 그거 저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보고 너무 좋았는데, <러브레터>는 별 다섯 개죠 말할 것도 없이 5점 만점에 5점,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는 스릴러의 교과서적 영화죠 별 다섯 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최고의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고전이죠 별 세 개 반. 그렇게 왓챠 별점 목록을 서로 대조하며 영화 제목 하나씩을 말할 때마다 수진 씨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수진 씨가 먼저 <번지점프를 하다>에 관해 말하기 전까진 전혀 모르는, 알 필요도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먼저 연락처를 물어온 건 수진 씨였고, 먼저 연락을 한 사람은 저였어요. 수진 씨는 서울에 살고 저는 대전에 살고 있지만 요즘 대전에서 서울까진 KTX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걸요. 서울에서 판교나 분당까진 편도로 1시간 30분이 넘는다면서요? 어떤 면에선 서울 근교보단 확실히 먼 쪽이 나은 편이지 않을까요? 태희와 인우의 인연은 17년을 돌아 다시 만났다가, 또 그것도 모자라 뉴질랜드까지 건너가고 나서야 완성되잖아요. 그렇게 말했더니 수진 씨가 활짝 웃더라고요. 아, 뉴질랜드 그건 영화 이야기예요, <번지점프를 하다>. 아마 그 영화 안 보셨으면 모르실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수진 씨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러게요. 여긴 확실히 좀 막히네요. 아예 저쪽으로 돌아서 세워주시면 어떨까요? 네, 저기 구석에요. 거의 다 오긴 했네요. 이번 주 일요일에 비가 올 거래요. 비가 오고 나면 꽃도 다 떨어지고 봄도 끝난다는데, 그래서 마지막 벚꽃을 보러 왔어요. 제가 90살까지 산다고 치면 봄이 제 인생에 이제 60번밖에 안 남은 거잖아요. 기상이변이 오지 않는 이상 봄꽃은 1년에 한 번뿐이니까 말이죠. 그렇게 따지면 이 짧은 봄이라는 계절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아 이건 제가 한 말은 아니고 수진 씨가 한 말이에요. 저기 네, 저기 골목에 세워주세요. 네 맞아요 빨간 옷을 입고 노란색 가방을 든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카드 계산할게요, 감사합니다. 기사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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