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낮은 침대' 노래소설
빗방울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울리는 M의 집 지붕 아래 낮은 침대에 누워, P는 언제까지 이런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이 집의 장점은 이렇게 내리는 빗소리를 여과 없이 서라운드로 들을 수 있다는 거야." P는 M의 집에 방문할 때 비가 내리면 항상 신나는 톤으로 반복하던 M의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그래, 정말 그러네. 신기하다."는 추임새를 놓치지 않았다. 그만큼 P는 M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았고, M이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더욱 기뻐하는지 혹은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는 늘 자신이 이 연애 관계에 있어 약자라고 생각했다. 그건 M이 P에게 줄곧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는데, P가 느끼기에 M은 자신에게 단순한 관계 이상으로 소중히 대한다고 느낄만한 표정이나 말투들을 표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M은 그 자체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고 P도 처음에는 특별한 소유욕이나 집착이 없이 가벼운 감정을 이어갔지만, 1년이 넘도록 M을 보아오며 P는 일정 관계 이상을 M에게 요구하길 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스스로에게 큰 환멸을 느꼈다. 만나고 헤어지는 순서나 인과가 물 흐르듯 경계 없이 지나가곤 하는 이 세계에서, 파트너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으나 P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야 고백하자면, P는 M을 만났던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으며 첫 섹스를 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M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M에 대한 감정이 그 시점에 다다르자 P는 M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명백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M을 보며 떠올릴 때마다 P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 단어를 M의 저 얼굴을 보며 떠올리면 안 되는 건데, 그런 말을 함부로 뱉으면 안 되는 건데 라며 스스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P는 M을 만날 때마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고 싶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놈들이랑 자지 말고 나랑 자, 아침저녁으로 네가 나에게 연락해주면 좋겠어, M의 휴대폰에 깔려 있는 틴터나 잭디 어플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그 주소록에서 딱 내 전화번호, P라는 이름 한 글자만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왔다. 아마 영원히 실행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천정 위로 내려앉는 빗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될 무렵, P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오늘 일찍부터 일정이 있어 먼저 나가본다고, 문을 잘 잠그고 나와 달라는 M의 메시지가 핸드폰의 첫 번째 알림으로 올라와 있었다. 익숙하게 핸드폰을 열어 ‘ㅇㅇ’ 단문으로 M에게 답을 한 후 P는 다시 그대로 M의 침대에 풀썩 고꾸라지듯 몸을 누였다. M과 술을 마시거나 혹은 M과 함께 파티라도 가는 날에 P는 항상 그다음 날의 일정을 잡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M과 함께 하는 밤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 미리 회사 일정을 조율해 연차 신청을 넣어두는 행동을 반복한 것도,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P와 M이 만나는 거점 지역은 대체로 이태원이었고 M의 집은 이태원역에서 가까운 곳이 위치했기에 둘은 언제나 데이트의 마무리를 M의 집에서 하곤 했다. M과 만나는 날이면 대체로 P는 옷매무새를 미리 가다듬고 가장 좋은 향수를 뿌리고 근사한 가방을 드는 등 외모에 신경을 쓰는 행동을 반복하곤 했는데, M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투자하는 그 모든 것들에 비해 M은 언제나 P를 목이 늘어난 반팔티셔츠, 혹은 때가 잔뜩 탄 후드티셔츠 하나로 일관하며 맞이하는 것이 P는 언제나 서글펐다. 이를테면 애증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M에게 느끼면서도, P는 그 감정에 대해, 혹은 서운함에 대해 제대로 그에게 말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이제 막 깨닫게 된 참이다.
장마가 온다고 했었나, P는 핸드폰을 열어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포털사이트의 주간 예보나 일일 예보 어디에도 서울에 비가 오래도록 내릴 거라고, 장마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곳은 없었다. 기상 이변이라도 생긴 건가, 하긴 요즘 날씨가 좀 오락가락 하긴 했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지붕의 빗소리를 들으며 P는 생각했다. 만일 이대로 비가 그치지 않아 한강이 범람해 서울이 물바다로 변한다면, 분명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M의 집은 가장 늦게 물이 새고 천정이 내려앉겠지. M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고 M이 애지중지하는 이 낮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던 나는 침대와 함께 아주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리겠지. 만일 그런 재난이 닥친다면 M은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찾으며 괜찮냐고, 다친 곳은 없냐며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줄까. 그렇게 된다면 그땐 M이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줄까. 빗방울은 여전히 요란스럽게 M의 지붕을 때리듯 훑고 있었고, P는 이 비가 그치지 않기를, 이 세상이 여기서 완전히 끝나버리기를 바라며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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