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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영 Nov 20. 2018

10에서 20으로

자전거에 대하여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타고 한동안 열심히 자전거 출, 퇴근을 했을 때는 이동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만 했다. 집에서 당시의 직장이었던 과천 서울대공원까지는 편도로 16km 남짓,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양재천의 자전거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던 시기라 어떤 변수를 만날지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속도 때문이었다. 내 자전거로는 아무리 밟아도 평균속도 10km/h 이상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시간 정도라면 도착해야 했던 출근길은 때때로 1시간 반이 훌쩍 넘게 걸리기도 했다. 내 체력 탓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 서울대공원에서 하던 일이란 동물들을 대상으로 온갖 궂은일을 담당하는 일이 절반 정도였고 매일같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드넓은 서울대공원을 뛰어다니며 체력은 점점 좋아졌기 때문에 그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결국 몇만 원짜리 자전거라 그런가. 내가 느리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매일 타고 다니던 나의 자전거가 한낱 고물처럼 느껴졌다. 


그 하이브리드는 그 뒤로 반년 정도 더 나와 함께 했다. 앞뒤 좌우할 것 없이 전부 까만색인 자전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흙먼지를 꽁꽁 싸매더니 흙회색으로 바뀌었다. 비를 맞든 진흙탕에서 구르든 나는 늘 내 엉덩이가 닿는 안장 부위만을 물티슈로 적당히 닦았을 뿐, 체인에 기름칠을 하거나 타이어를 갈아준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바람이 없다 싶으면 적당히 근처 자전거 상점에서 바람만 넣고 돌아서곤 했다. 물티슈 한 장과 공용 펌프, 그게 그 자전거에게는 세상의 전부였으리라. 


이따금씩 한강에 나가서 자전거를 타고 싶을 때 지출하는 대여료가 아까워서 구입한 자전거였고 또 내 돈으로 직접 산 것이 아니었으니 이동수단 그 이상의 애정을 쌓았을 리 만무했다. 출퇴근길에 나보다 빨리 지나가는 자전거들을 바라보며 '저 정도만 돼도 좋을 텐데' '저 자전거 정말 예쁘고 빠르다'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고 차츰 자전거 출퇴근이 일상이 아닌 고통이 되어갈 즈음 본격적으로 중고카페에서 지금의 것보다 한 단계 상급의 자전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고민하면서 카페의 판매 게시판을 샅샅이 뒤진 결과 인생 최초의 로드자전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인해 판매자 말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판매한다던 하얀색 엘파마 에포카 구형 자전거였다. 처음 보는 드롭바라는 것이 붙어있었고, 무게도 이전 것의 ㅡ과장을 좀 보태서ㅡ10배는 더 가벼웠다. 꼬깃꼬깃 모았던 25만 원을 엘파마 자전거의 판매자에게 내밀고 자전거를 받아 나오던 순간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새 자전거에겐 '펜펜'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미사토라는 인물이 키우는 펭귄의 이름이다. <에반게리온>에서 미사토와 펜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데, 나는 미사토가 아니지만 미사토와 펜펜의 유대와 비슷한 감정을 첫 로드바이크에 대입하고 싶었다. 하얗게 빛나는 로드바이크가 집에 들어오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하이브리드는 자연스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 뒤에 하이브리드는 누군가에게 그냥 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고물상에 헐값에 팔아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후처리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하이브리드는 그즈음 서로 연락을 끊어버린 남자친구와 나의 관계처럼, 가물하게 사라져 갔다. 


그 뒤 과천에서 서울 마포 쪽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더욱 열심히 자전거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오히려 조금 늘었지만 제대로 정비된 한강 도로만을 달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볍고 빨라진 자전거가 있으니 신이 났다. 단 한 번도 20km/h이상의 속력을 내어 본 적이 없던 나는, 영동대교를 지나 잠수교로 향하는 길목에서 난생처음 그 속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헬렌 켈러가 'Water'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산뜻하고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몹시 좋았다. 


그때부터 나와 자전거의 유대는 급속도로 끈끈해지기 시작했다. 슬픈 결말을 맞이해도 서로를 잊지 못하던 미사토와 펜펜처럼,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자전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때 확신했다. 10에서 20이라는 속도의 범주로 점프하던, 바로 그 길 위에서 말이다.   


단 한 장의 사진만 남아있는, 나의 하이브리드 자전거.
그리고 나의 첫 로드, 엘파마 에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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