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실락원' 초단편 노래 소설
HS사의 미니어처 DIY세트는 타사의 DIY세트보다 디테일한 부분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지름 10cm에 두께가 2cm에 달하는, 미니어처로서는 큼지막한 테이블을 만드는 것조차 십 수 분이 소요될 정도다. 커팅 매트에 이 동그란 물체를 올려놓고 몇 분 동안을 노려만 보고 있는지 모른다. 도안도 맞게 되어 있고 본드나 툴이나 무엇 하나 이상한 것이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같은 제품 내에서 몇 번째의 오류가 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서재를 다 만들기는커녕 책장 하나 만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자고 이걸 사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ㅡ본드도 할당량이 있어서 좀 더 단단하게 붙이려면, 개인적으로 맞는 걸 따로 구매해야 돼. 여기 이 핀셋도 세트에 들어있는 건 너무 두껍고 커. 좀 더 작은 작업을 하려면 말이야 지홍아,
다시 커팅 매트에 테이블을 올려놓고 곰곰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동그란 부분의 어디가 맞지 않아서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지 모르겠다. 이 작은 물건을 무게를 실어 가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 나무를 구해다가 직접 만들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들고. 고작 책장 옆에 놓이는 간이 테이블 하나인데 이렇게 나를 괴롭히다니. 서재고 뭐고 이 DIY세트를 죄다 내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든다. 핀셋 세트도 병원에서 쓰는 것을 어렵게 친구에게 구해서 구매했고 커팅 매트도 하나에 3만 원이 훌쩍 넘는 비싼 놈으로 구매했건만, 고작 만 이천 구백 원짜리 싸구려 DIY세트의 부품 하나 따위가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할 줄은 몰랐다.
ㅡ공장에서 찍어져 나오는 것보다 나는 이렇게 힘과 시간이 좀 들어도 직접 가공하는 게 더 좋더라고. 작은 도안만 있으면 뭐든 만들 수 있으니까 오히려 더 만드는 재미가 있더라.
그러니까, 애초에 이런 싸구려 DIY세트를 사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ㅡ그러니까, 지홍아 여기 좀 봐. 여기 이 작은 나무 쪼가리 가져가서 조금만 다듬으면 근사한 테이블을 만들 수 있겠는걸.
서재를 만드는 건 다른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책 하나하나의 각을 맞추어야 하고 책 두께도 신경 써서 몇 밀리미터의 오차범위라도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완벽한 책장이, 완벽한 서재의 모습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예희는 서재의 미니어처를 다른 그 어떤 미니어처보다 좋아했다. 언젠가 결혼 같은 걸 하게 되면 꼭 이렇게 근사한 서재를 만들어 놓을 거라고, 그때를 위해 미리 예습하는 거라고 그녀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내가 미니어처를 만드는 도구들을 하나 둘 사 모았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예희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싶어서. 예희와 같은 결 위에서 숨 쉬고 싶어서.
ㅡ지홍아 이거 봐봐. 내가 만든 페인트 색깔 엄청 예쁘지? 이걸 가지고 창문틀을 칠할 거야.
새로 산 커팅 매트의 산호색은 예희의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에 온통 산호색 페인트를 묻히고 나를 향해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던 예희의 얼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산호색을 만들어보겠다고 빨간색과 하얀색, 노란색, 적갈색 물감들을 잔뜩 머리카락에 묻혀가며 헤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물감 조각을 떼어주며 나는 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거라고, 둘이 함께 이 손톱만 한 세상, 우리만의 낙원을 만들어가며 살아갈 거라고 다짐했다.
산호색 웃음으로 나를 한껏 안아주던 예희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예희가 떠난 후로도 나는 이 작은 조각들을 그녀와 함께 내던져버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희가 돌아오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그녀가 없어져 폐허가 되어버린 이 작은 세상을 보듬고 다듬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 책상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예희와 함께 만들었던 식당, 분식집, 우체국, 병원 등의 미니어처들이 열을 맞춰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희가 버리고 내가 주워 담은 이 작은 세상에서 나는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미니어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한 지 몇 개월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발을 굳게 붙이고 머물러 있다. 산호색 웃음의 그녀가 나를 발견해 돌아봐 줄 것 같아서. '지홍아 이거 봐, 여기 예쁜 조각이 있어.'라며 나를 들어 올려줄 것 같아서. 다시 그녀의 조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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