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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영 Jan 04. 2019

<양들의 침묵>(1991)


<양들의 침묵>을 처음 보았을 당시를 뚜렷하게 기억한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동네 비디오 방을 전전하던 시절, 빨간색 딱지가 붙어있고 하얀 소년 혹은 소녀와 같은 얼굴의 입 부분에 해골 얼굴을 가진 벌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던 포스터. 그 한 장의 사진만으로 어머니에게 갖은 떼를 쓰고 아양을 부려 비디오를 빌려달라고 간곡히 청하기엔 충분했다. 그 사이 시간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이 비디오를 <수선화>라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빌려 주셨고 나는 집에 혼자 있던 저녁에 <양들의 침묵>을 '어쨌든' 보았다. 물론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의 마스크는 거의 악마에 가깝게 느껴지는 수준이었으며 그가 대수롭지 않게 행하는 모든 심리전도 난생처음 겪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절절히 무너뜨린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영화의 엔딩.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오프닝으로 인해 열리고 엔딩으로 인해 완벽하게 닫히는 구조라 굳게 믿었던 나에게 <양들의 침묵>이 충격을 안겨 준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열린 결말'이라는 걸 알지 못하던 나에게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와 공포 장르에 대한 애호를 시작하게 해준 영화였다. 


 <양들의 침묵>의 결말. FBI에 근무 중인 클라리스(조디 포스터)는 한니발 렉터 박사의 간접적인 도움을 받아 '버펄로 빌'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정식 수사관으로 임명된다. 그녀의 승진 파티에 걸려오는 렉터 박사의 전화. 행방이 묘연했던 그에게 다급하게 행적을 묻는 클라리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렉터 박사는 이렇게 질문한다. '양들의 울음소리는 그쳤는가?' 변장을 한 렉터 박사는 차분하게 그녀의 승진을 축하하며, 자신은 이제 오랜 친구를 먹을 생각이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반가움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는 클라리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렉터는 전화를 끊고 표적을 향해 유유히 사라진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한니발 렉터의 뒷모습. 그의 깔끔하고 지식인과 같은 용모가 살인, 식인과 연결되었을 때 나타나는 섬뜩함. 그 모든 감정을 간접적이지만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살인의 예고와 동시에 평생토록 한니발 렉터를 기억하도록 세뇌된 클라리스의 불안함을 보는 것 같아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살인범과 형사의 사유적 로맨스, 두 사람은 언젠가 만나야 할 것이라는 숙명마저 느끼게 만드는 미스터리한 엔딩 씬. 이후 <양들의 침묵>의 속편인 '한니발 시리즈'는 계속해서 제작되었지만, 어느 것에서도 <양들의 침묵>만 한 흥미를 느낄 순 없었다. 이 영화가 나에게 선사한 거의 최초의 지배적인 스릴러의 충격은 죽을 때까지 깨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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