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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영 Jan 06. 2019

<글래디에이터>(2000)

 

가끔 완성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배우의 인상만이 내러티브나 명장면들보다 더 진득하게 남아있는 영화를 마주할 때가 있다. 2000년 개봉 이후 지금까지 자의든 타의든 다섯 번은 넘게 보았던 <글래디에이터>가 바로 그런 경우다. 처음 극장에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절정의 호사를 누리던 로마를 그대로 묘사해낸 압도적인 로케이션과 더불어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이었던 막시무스, 그러니까 '러셀 크로'라는 배우의 카리스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이후 <글래디에이터>를 연달아서 마주하게 될 때마다 러셀 크로의 그늘에 가려진 비운의 왕자 코모도스, 즉 그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코모도스는 막시무스를 빛나게 만드는 그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여서, 어둠의 사신이라도 된 듯 영화 속 모든 어둠과 계략, 밀약들을 조종하고 그가 가진 특유의 질투로 인해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막시무스가 필요 선이라면 코모도스는 필요 악의 존재로, 그는 <글래디에이터>의 내러티브와 주인공 막시무스의 희비극을 부각하는데 가장 강한 영향력을 선사하는 인물이다. 좋은 옷으로 치장되어 있으나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코모도스의 캐릭터 자체는 클리셰에 가까운 고전적 인물이었으나, 그런 코모도스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눈빛만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금빛으로 치장된 옷과 가구를 곁에 두고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지 못해 주변인들을 학대하고 막시무스를 칼로 찔러 버리는 코모도스, 호아킨 피닉스의 꽉 다문 입. 그 입 주변으로 병색과 퇴폐색이 완연한 차가운 미소가 번져 나갈 때 느껴지던 소름이 아직도 <글래디에이터>를 생각할 때마다 선명하게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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