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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Apr 29. 2019

택배를 받아준다는 것

저녁도 먹지 못한 채 9시까지 야근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 집 근처 분식집에 들렀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부부가 몸이 불편한 딸과 운영하는 곳인데 매운 떡볶이가 생각날 때 가끔 간다. 조금 거북한 점은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내게 주인아주머니가 매번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소심해서일지, 깍쟁이라 그런지 음식점이나 커피숍같이 내가 손님으로 들리는 곳에서 주인이 아는 척을 하면 갑자기 불편함이 밀려오면서 다시 들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회사 동료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주인이 알아보면 서비스를 줄 수도 있고 불친절한 것보다는 백배 나은데 뭐 어떠냐며 날 까다로운 사람 취급했지만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도 분식집에 들어가자마자 철판의 떡볶이를 젓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떡볶이 1인분에 튀김 1인분 맞죠?”라고 먼저 물어 머쓱하게 “네, 네”하고 대답했다. 마침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아줌마는 튀김을 기름에 집어넣으며 나보고 혹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다니지 않는다고 대답했더니 볼 때마다 점잖고 말이 없어서 전도사님인 줄 알았다며 깔깔 웃었다.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고는 뒤를 돌아 메뉴판 보는 척을 했다. 떡볶이가 나오자 비닐봉지를 집어 들고 얼른 나와버렸다. 평소에도 숫기 없고 샌님 같아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 스트레스였는데 교회 전도사인 줄 알았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주책맞은 아줌마 때문에 앞으로 이 분식집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10년 전의 그가 떠올랐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50대 중반의 남자. 단정한 유니폼 차림에 2층 중앙계단 위에 자리한 경비실을 묵묵히 지키던 대학 시절 내가 살던 기숙사의 경비원이었다.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은 검정 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모습이 꼭 선생님처럼 보이던 사람이었다. 건물 1층은 서점, 문구점, 푸드코트가 있는 상가였고 2층부터가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였는데 경비실을 거쳐야만 호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부인이 기숙사로 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게 경비의 임무였지만, 실제로는 택배 보관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당시는 인터넷 쇼핑이 한창 시작되던 시기라 기숙사 학생들의 택배는 끝도 없이 배달됐다. 경비 아저씨는 배달된 택배를 보관해놨다가 찾으러 오는 학생의 신분증을 확인해서 택배를 전달해줬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고향인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에 진출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을 느끼면서도 나와는 어딘가 묘하게 다른 서울 친구들의 세련된 모습에 주눅이 들곤 했다. 그때부터 제주도 촌놈의 촌티를 벗기 위해 옷을 마구 사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싸구려 티셔츠와 바지를 사들이면서 택배가 일주일에 몇 개씩 배달됐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가 올 때도 있어서 경비아저씨를 교수님보다 더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쓰고 있던 안경을 이마에 걸쳐놓고 택배물품 보관대장을 살피는 경비아저씨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수시로 배달되는 나의 택배 상자가 부끄러웠고, 경비아저씨의 일을 늘렸다는 생각에 죄송스럽기도 했다.


나 같은 학생들이 많았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기숙사로 들어오는 택배 물량이 너무 많아져 경비 아저씨가 택배 보관 이외에 경비 본연의 업무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에 따라 학생들의 불만이 늘자 기숙사 측에서 무인택배보관함을 경비실 옆에 설치했다. 택배 기사가 택배함에 물건을 보관한 뒤 보관함 번호와 비밀번호를 수령자에게 문자로 전송해서 택배를 찾는 방식이었다. 택배가 맡겨진 시간으로부터 2시간 이내에 찾아가는 경우만 무료였고, 그 이후에는 2시간당 5백 원의 추가 요금을 내야 했다. 사실 큰돈도 아니고 택배를 찾을 때마다 매번 불편하게 경비아저씨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무인택배함이 반가웠다.


그렇게 신입생의 자유를 만끽하던 중 추석을 맞이했다. 고등학생 때 까지는 매년 큰아버지 댁에 모여 차례를 지냈지만, 성인이 된 첫 해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추석 연휴에 여자친구와 에버랜드를 가기로 약속하고 부모님께는 과제가 많아 이번 추석에는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추석 연휴에는 식당도 문을 닫아 먹을 것도 없을 거라며 내려오라고 했지만, 편의점도 있고 대학가라서 연휴에도 여는 식당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혼자 명절을 맞이할 아들이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친구들과 나눠먹으라며 제주도에서 황금향을 20kg이나 보내줬다. 다행히 택배는 명절 연휴 전 날 도착했고, 택배함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크기의 박스라 전처럼 경비 아저씨가 맡아줬다. 경비아저씨에게 찾아온 황금향을 룸메이트에게 나눠줬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나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라 고민을 하다가 문득 추석 연휴에도 일하는 경비아저씨가 생각났다.


연휴 첫날 모두 집으로 떠나 조용한 기숙사 건물을 지키던 경비아저씨에게 황금향을 몇 개 담은 비닐봉지를 쭈뼛거리며 내밀었다. 아저씨는 뭐 이런 걸 다 주냐면서도 잘 먹겠다고 했다. 별 것 아닌 일인데 뭔가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렇게 추석은 지나갔고, 연휴 전에 주문했던 운동화가 배달되기로 한 날이 되었다. 분명 그날까지 배송된다고 했는데 오후 6시가 넘도록 택배함에 물품을 보관했다는 문자가 없어 배송 조회를 해보니 이미 배송 완료라고 나와있고 수령인은 경비실이라고 쓰여있었다. 슬리퍼를 끌고 경비실에 가서 혹시 이우철 앞으로 온 택배가 있냐고 물었고 경비 아저씨는 슬며시 웃으며 내게 택배 상자를 건네줬다.


택배기사님이 왜 택배함에 맡기지 않았는지는 관심도 없고, 새 운동화를 신을 생각에 신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의 택배는 택배함이 아닌 경비실로 계속 배달됐다. 택배를 찾으러 갈 때마다 예전처럼 경비아저씨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 다시 불편해졌다. 간혹 택배기사님이 방문 예정이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경비실에 맡기지 말고 그냥 택배함에 보관해달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택배는 경비실로 배달됐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 이유를 알았다. 택배 기사님이 바닥에 택배 상자를 쌓아놓고 택배함에 하나하나씩 물건을 넣고 있고, 그 옆에는 경비 아저씨가 쭈그려 앉은 채로 내 택배를 찾고 있었다. “마침 왔네”라고 말하며 나의 택배를 전해주는 아저씨에게 번거로우실 텐데 택배를 맡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아저씨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빨리 찾아가지 않으면 추가 요금이 몇 천 원씩 나오는 경우도 있다면서 학생이 돈이 어딨냐고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어른의 호의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감사하다고 얘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2학년 1학기까지 택배를 사이에 둔 아저씨와의 불편한 공존이 이어졌다. 그 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갈 예정이라 학점 따위는 관심도 없이 술 마시고 놀기 바쁘던 어느 날 경비실에 처음 보는 아저씨가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다음 날, 또 다음날에도 이전의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경비 아저씨가 바뀌었구나 싶었다. 아쉬움보다는 앞으로 택배를 찾을 때 불편하게 경비아저씨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했다.


경비아저씨가 바뀌고 며칠 뒤 룸메이트 태준이와 기숙사 지하식당에서 식권으로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우철아, 너 지난주에 여자 기숙사에서 난리 난 거 들었냐?” 스포츠의학과에 다니던 태준이가 말했다.

“아니? 뭔 일 있었어?”

“우리 과 선배가 말해줬는데, 새벽 2시였나 3시였나, 여자 기숙사에 사는 애 남자친구가 경비 아저씨 몰래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려다가 들켰대”

“그래서?”

“경비 아저씨가 그거 보고 쫒아가서 남자애한테 막 뭐라고 했나 봐. 근데 걔가 완전 취해있어서 경비아저씨를 막 때렸대. 요새 안 보이는 그 안경 쓴 아저씨 있잖아. 안경 부러지고 얼굴에 피도 나고 그랬다더라. 그러고 나서 바로 관뒀다는데?” 별 일 아니라는 듯 밥을 넘기며 태준이가 말했다.


그 이후 나의 택배는 모두 무인택배함에 보관됐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그 전에는 별거 아닌 것 같던 추가 요금 5백 원이 아까워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헐레벌떡 뛰어가기도 했고, 운이 나쁘게 MT에 가 있는데 택배가 배달되었을 때는 다음날 4천 원이 넘는 돈을 내고 택배를 찾은 적도 있었다. 그 후 나는 군대를 갔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름도 모르던 10년 전의 경비 아저씨는 내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가 오늘 떡볶이 아줌마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지난 10년간 나는 더 깍쟁이가 되어만 갔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도 싫고 부탁받는 것은 더 싫어했다. 모르는 이에겐 경계가 먼저였고 이유 없는 호의에는 의심으로 대했다. 담배를 사러 일주일에 몇 번씩 가는 편의점 사장님은 언제나 나를 처음 보는 손님으로 대하고, 2년째 지내고 있는 오피스텔 옆 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바란 것이고 편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떠오른 10년 전 경비아저씨의 기억이 야박한 내 마음에 틈을 만든다. 하루에 몇 번씩 배달되는 수많은 택배 상자 속에서 내 이름을 찾기 위해 경비실 문을 열고 나오던 아저씨의 행동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친절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고 정이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따뜻함이라 부르면 얼추 비슷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마 나는 집 근처 분식집 사장님의 인사에 반갑게 화답하고, 근황을 물으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내게는 어려운 게 참 많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회를 알아가면서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이 자꾸 아쉬운 요즘이다. 그럼에도 그 분식집에는 가끔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다 보면 검정 비닐봉지에 아무렇게나 담은 귤을 경비아저씨에게 건네던 그 시절의 서투름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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