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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Apr 30. 2019

토마토의 맛

어제는 준서 때문에 진이 다 빠졌다. 평소엔 안 그러던 아이가 기저귀를 새로 갈아주기만 하면 달려와서 또 오줌을 눴다고 배시시 웃는데 힘들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가만히 있으면 너무 이쁜데 그럴 때는 가끔 밉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다음날 수업에 쓸 교보재를 만들어야 했다. 바닥에서 하도 칼질을 해서 아무렇게나 빗금이 가버린 내방 장판이 꼭 내 신세 같았다. 거울을 보면 스물아홉 같지 않고 몇 살은 더 들어 보여 서글퍼졌다. 


그저 아이들이 좋아 시작한 일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지쳐버렸다. 유치원 임용고사에서 탈락하고 어린이집에서 일한 지 6년째다.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생긴 작은 생채기에도 죄인이 되고, 역한 똥오줌 냄새가 몸에 배긴 것 같아 서글플 때가 많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인스타그램에 팔로우를 신청하는 어머니들을 보면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래도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재잘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버텨왔는데 그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오전에는 체험학습이 있었다. 어린이집 근처에 있는 딸기농장에 다녀왔는데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 반 아이 중 짓궂은 몇 명이 유빈이에게 얼굴이 딸기 같다며 놀려댔다. 유빈이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짓다가 내 뒤로 와서 바지를 붙잡고는 한참이나 작은 소리로 울었다. 놀린 아이들에게 친구를 괴롭히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사과를 시켰다. 쭈뼛대던 아이들이 한 명씩 유빈이에게 사과와 포옹을 하면서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


유빈이는 처음부터 얼굴이 조금 빨갰다. 아버님에게 아토피나 피부염이 있는지 여쭤봤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건조할 때만 넘기면 괜찮다면서 대수롭지 않아 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나아지지 않는 듯해 알러지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알겠다고만 하고는 답이 없다. 원장 선생님 말씀으로는 유빈이가 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 혼자서 유빈이를 키운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트럭에서 과일을 파는 일을 하는 데 형편이 좋아 보이진 않아 보였다. 항상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에 정리되지 않은 잔머리, 가끔은 세탁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옷을 입고 오는 아이였다.


유빈이는 나와 같이 지낸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면서도 매번 수줍어했다. ‘선생님, 선생님’ 부르며 어리광을 부리는 귀여운 아이들에 가려 눈에 띄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여섯 시면 데리러 오는데 유빈이 아빠는 항상 늦었다. 보통 여섯 시 반, 조금 늦으면 일곱 시에 오는데 그때마다 복숭아, 딸기, 참외 같은 과일을 갖고 왔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도 막무가내였다. 팔다 남은 것들이라며 매번 자기 때문에 퇴근이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눈도 못 마주치고 말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오늘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하원을 하고 유빈이와 나만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신나게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정리하고 있는데 유빈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평소에는 혼자 조용히 자기 애착 인형을 갖고 노는 아이인데 이상했다. 치울 게 많아 못 본척하고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다리를 붙잡고 업어달라고 했다. 한 명을 업어주면 다른 아이들도 다 업어줘야 하고, 몇 명만 업어주다 보면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원장 선생님의 말에 평소에는 절대 업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체험학습 일도 있고 해서 그냥 업어주고 싶었다.


“유빈아, 오늘 딱 한 번만 업어주는 거야. 다음에는 절대 안 돼. 알았지?”

“네, 선생님.”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업었는데 왠지 어색했다. 생각보다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 몇 년 동안 아이를 보면서도 업는 것은 처음이라 등에 닿는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이 낯설었다. 유빈이를 업고 교실을 두 바퀴쯤 돌고 밖이 보이는 창문 앞에 섰을 때 유빈이가 나의 목을 감싸며 작게 말했다.


“엄마...”


생각지도 못한 엄마라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다지 다정하지 못한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다섯 살 난 아이에게도 외로움이 깃들었다는 생각에 원망이 일었지만 무엇을 향해야 할지 몰랐다. 깔끔하지 못한 차림새에 늘 주눅이 들어있는 아이를 답답해했던 내가 미워져 그냥 울었다. 눈을 감고 창가 앞에서 몇 분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그때 벨이 울렸다. 얼른 유빈이를 내려주고 눈물을 닦고 나갔다.


“아이고, 선생님. 매번 죄송합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땀으로 앞머리가 젖은 채로 유빈이 아빠가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저도 교실 정리하고 이것저것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네네, 고맙습니다. 유빈이는 요새 친구들하고 잘 지내나요?”

“네. 배려심이 많아서 친구들이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아, 별거 아니지만, 이거 좀 드세요. 오늘은 팔다 남은 게 아니라 싱싱한 것만 미리 빼놨던 거예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봉지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빈이와 아빠가 가고 나서 검정 비닐봉지를 열었다. 빨갛게 익은 싱싱한 토마토가 열개쯤 들어있었다. 그중에 가장 싱그러운 것을 꺼내 씻지도 않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늘따라 토마토가 유독 시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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