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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May 03. 2019

비 오는 날의 모임

재식은 모처럼만에 대학 친구들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갓 회사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취직 턱이다 뭐다 해서 가끔씩은 만났는데, 요새는 다들 일 때문에 바쁜지 연락조차 뜸해졌다. 이번 만남은 재작년에 이라크 발전소 건설현장으로 파견 나갔다가 지난주에 한국으로 복귀한 범수의 귀국 환영식이었다. 하필 그 날 재식에게는 잠실에서 열리는 심포지엄 일정이 있지만, 이번에 만나지 못하면 몇 달 후에나 보게 될 것 같아 피곤을 무릅쓰고 홍대의 삼겹살집으로 예정된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멤버는 재식까지 넷이었다. 같은 학과는 아니고 서예동아리인 애서회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동갑내기 남자 세 명에 한 학번 아래의 유일한 여자 멤버인 희란은 동아리 내에서도 유독 뭉쳐 다녀 매난국죽 사군자로 불렸는데, 은은한 먹 냄새가 풍겨야 할 동아리방을 술 냄새로 가득하게 만든 주범들이었다.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넷 다 싱글이라 오랜만에 편하게 술을 마실 생각에 재식은 하루 전부터 들떠있었다.


약속한 금요일이 되어 재식은 한-일 의료기기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마지막 기념촬영까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을 탔다. 슬며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 때문에 습기와 냄새로 가득 찬 퇴근길 지하철 안에 서서 그는 카카오톡을 열었다.


재식 [야 나 지금 일 끝나고 지하철 막 탐. 7시보다 약간 늦을 듯]

범수 [주인공이 제일 먼저 도착하게 생겼네. 다들 빨리 온나. 서울 낯설다…]

희란 [오빠, 나도 좀 늦을 것 같은데 ㅠㅠ 근데 미주도 같이 가도 되지?]

영철 [패션디자인과 김미주?]

희란 [응. 며칠 전에 오빠들 만난다고 얘기했더니 미주도 오고 싶다고 해서~ 얘가 오빠들 보고 싶대~~ ㅋㅋ]

범수 [오 좋지. 오랜만에 보겠네. 다들 빨리 와 ~~]


미주라면 재식이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3학년 1학기에 동아리에 들어온 후배였다. 맨날 퀭해 있는 얼굴에 모자를 눌러쓰고 자기 몸통만 한 화구통을 뒤로 매고 다니던 애. 꾸미지는 않아도 나름 얼굴은 예쁘장해서 재식이 밥을 사주겠다고 몇 번 문자를 보냈지만 별 반응이 없더니 지드래곤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같은 과 남자친구와 CC가 되어 나타난 아이였다. 그 후로는 그냥 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가 졸업 후에 동아리 선배 결혼식에서 잠깐 본 게 마지막이었다.


재식은 약속한 7시를 조금 넘겨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서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범수와 영철이 손을 흔들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건강해 보이는 범수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나눴다. 그냥 이라크에 말뚝 박지 왜 왔느냐는 둥,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배가 나왔냐는 둥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을 때 입구에서 그녀가 걸어 들어왔다.


미주였다. 다만 화구통을 메고 다니던 당시의 풋풋한 모습은 흔적도 없이, 성숙한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를 온몸으로 증명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건 분명 미주가 맞았다. 의류회사에 다닌다더니 몰라보게 세련되진 미주의 모습에 재식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주야. 진짜 오랜만이다. 2년, 아니 3년 만인가?” 미주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식이 말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진짜 반가워요. 근데 선배 많이 달라졌네요.” 재식은 미주의 ‘달라졌네요’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지만 바로 물어보지 못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재식에게 미주와 함께 들어온 희란이 “오빠, 미주가 좀 짧은 치마를 입어서 안으로 들어가야 같은데”라고 말했다.

“어? 어. 그래.” 재식은 자신이 앉아있던 원형 테이블의 안쪽 자리를 미주에게 양보했다. 자리를 옮긴 그의 옆에는 미주가 앉았다. 엉겁결에 재식은 미주와 희란 사이에 껴있게 됐다.


자리에 앉자마자 모두들 서로의 근황을 묻는 와중에도 재식은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예전과 180도 달라진 미주의 모습에 2년 동안 죽어있던 연애 세포가 깨어나는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하늘이 준 기회가 오늘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미주에게 어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선배, 근데 의료기기 회사 다닌다면서요? 일은 어때요?”

“재밌어, 영업이 나랑 잘 맞는 거 같아. 나 지난달에 대리로 승진했어.” 장난처럼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재식은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미주에게 건넸다. 진급하자마자 인사관리팀에 명함을 바꿔달라고 요청한 자신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스물 아홉에 벌써 대리야? 야, 나는 이라크까지 갔다 와도 진급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승진 빠르네. 좋겠다. 그럼 오늘은 재식이가 쏘는 거 맞지?" 범수가 분위기를 몰아갔다.

“야, 안 그래도 내가 쏘려고 했어. 너도 한국 복귀했고 오랜만에 미주도 만났는데 당연히 내가 쏴야지” 재식은 미주에게 잘 보이려고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내뱉었다.


재식은 대학 시절 고깃집 알바를 하며 터득한 필살의 고기 굽기 스킬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최적의 상태로 고기를 구워내 오른쪽에 앉은 미주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능력뿐만 아니라 자상함까지 갖췄다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맞은편에 앉은 범수와 영철은 그런 재식을 보며 자기들끼리 킥킥댔다. 재식은 미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날까 봐 마지못해 왼쪽에 앉은 희란의 앞 접시에도 고기 몇 점을 올려놨다. 그러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미주는 자신의 접시에 있는 완벽하게 구워진 고기를 집어 옆에 앉은 범수의 앞 접시에 놓아주는 게 아닌가.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재식이 고기를 굽는 동안 가만히 앉아 미주와 노닥거리기만 한 범수에게. 이라크. 이라크. 그놈의 이라크에서 진짜 고생하셨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해가면서.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희란의 태도였다. 자신의 앞에 고기를 올려주는 재식에게 “난 괜찮으니까 오빠나 먹어”라며 자기 접시의 고기를 재식에게 옮겨주는 거였다. 고기라면 환장을 하는 서희란이. 희란은 그 후에도 재식이 그녀를 바라보고 얘기를 하면 쑥스러운 듯 몇 번이나 눈빛을 피했고, 평소엔 입 안의 내용물을 자랑이라도 하듯 음식을 씹으면서 깔깔 웃던 그녀가 요조숙녀처럼 얌전히 입을 가리며 얘기를 했다. 또, 재식은 자신이 미주에게 관심을 보일 때마다 "오빠, 있잖아"라고 말하며 미주와의 대화를 방해하는 희란을 보고 혹시 그녀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싶어 당황했다.


목욕탕에만 함께 들어가지 않았을 뿐, 형제와 다름없던 희란의 처음 보는 모습에 재식은 혼란스러웠다. 잘해보고 싶었던 미주는 엉뚱한 범수만 바라보고 있고, 단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희란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니 씁쓸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희란은 아니었다. 재식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미주에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근데 미주야. 너 아까 들어올 때, 나보고 달라졌다고 한 말. 그거 무슨 뜻이야?” 미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재식이 말했다.

“네? 아. 그거요? 선배 얼굴이 좀 변한 것 같아서요. 별 뜻 아니에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주가 말했다.

“아아. 내가 올해 초부터 교정을 시작했거든. 입 튀어나온 게 콤플렉스여서. 벌써 입이 좀 들어갔나 보네. 어때 보여?”

“그게 아니라 좀 아저씨 같아서 그런 건데... 관리 안 하면 이십 대 후반부터 늙기 시작하는 거죠. 뭐 신경 쓰지 마세요.” 미주는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제는 완전히 범수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아버렸다. 재식은 그런 미주의 등을 한동안 쳐다봤다.


재식은 자기에게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이는 미주의 태도에 상처를 받고 마음을 단념했다. 사람들과 연기로 꽉 찬 불금의 고깃집 안에서 자기만 외로운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남자로 봐주는 듯한 희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것, 재식은 술이나 실컷 먹자는 생각으로 희란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둘이서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희란은 계속 쑥스러워했고, 가끔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며 립스틱을 덧바르기도 했다.


그렇게 술자리는 계속되다가 마침내 빈 소주병이 9개나 쌓이고 나서야 불판의 불이 꺼졌다. 그중에 절반은 재식과 희란이 마신 거였다. 재식은 정신없이 취한 중에도 씁쓸함을 느끼며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가서 카드결제를 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고깃집에 들어올 때는 가랑비이던 게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퍼붓고 있었다. 비도 많이 오고 재식도 너무 취해버려 2차 없이 다들 헤어지기로 했다. 재식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택시를 잡아 신림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미주에게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와 택시 안의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겹쳐져 그를 더 괴롭혔다. 그 순간 재식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희란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재식 [희란아… 택시 탔어?]

희란 [응. 방금 타서 집 가고 있어]

재식 [다행이네… 근데 너 아까 왜 그런 거야?]

희란 [뭐?]

재식 [아니… 아까… 너 나랑 눈 마주치면 계속 피하고… 생전 안 그러던 애가 입도 가리면서 말하고… 너 혹시…]

희란 [어????? 이 오빠 왜 이래 ㅋㅋ 아저씨 술 좀 곱게 마셔!! 참나 ㅋㅋ]

재식 [내가 미주랑 얘기할 때마다 니가 방해한 건 뭐였는데...]

희란 [미쳤나 봐 진짜 ㅋㅋ 오빠 창피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까 고깃집에서 오빠 입 벌릴때마다 교정기에 고춧가루에 콩나물에… 고기까지 막 다 껴가지고… 난 오빠가 무슨 음식물 쓰레기 주워 먹은 줄 알았어. 진짜 비위 상해서 그 좋아하는 고기를 못 먹었네. 내가 고개도 돌리고 입도 가리고 또 뭐냐 거울도 보고 그랬으면 눈치를 채야지 정말]


재식은 선 잠을 자다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주한테 까인 것도 모자라서 자기 멋대로 희란의 행동을 착각해서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순간 그는 택시에서 뛰어내려 폭포같이 내리는 빗속을 막 뛰어다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희란 [오빠ㅋㅋ 뜬금없이 오늘 미주가 왜 나왔겠어? 미주가 왜 주구장창 범수 오빠한테만 말을 걸었겠냐고. 내가 미주를 범수 오빠 옆자리에 앉히려고 오빠 보고 비켜달라고 한 게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오빠한테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거야!]

희란 [그리고 오빠는 미주가 그렇게 좋았어? 왜 계속 내 쪽으로만 얼굴 돌려서 이빨을 쑤시는데? 진짜 삼일은 밥 맛 떨어지겠네! 헛소리 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양치나 깨끗이 하세요? 네?]


재식은 마지막으로 온 희란의 카톡을 보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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