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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May 06. 2019

할머니의 지혜

지난주 기획회의는 <대학IN 창간 10주년 특집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회의에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대학생이 어르신들에게 묻다>라는 꼭지의 기사가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한동안 좋은 기사를 못 내 초조하던 차에 의욕만 앞서 덜컥 일을 맡긴 했는데 막상 취재를 하려니 걱정이었다. 어디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3대가 같이 사는 친구 영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식아, 나 이번에 맡은 기사가 평범한 어르신들 인터뷰 해야 하는 건데 노인분들 찾기가 쉬운 게 아니네. 혹시 괜찮으면 너희 할아버지 좀 만나 뵐 수 있을까?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셨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우리 할아버지 요새 치매기가 있어서 좀 그래. 인터뷰는 좀 어려울 것 같네. 근데 너희 할머니 계시잖아?”


내게도 할머니가 있다. 평생을 제주도에서 살고 계신 82세의 우리 할머니. 부모님이 서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도 자연히 서울 토박이로 자랐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주도 여행을 갈 때 찾아뵙고, 가끔 할머니가 서울에 오실 때만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와 손자이지만 조금 어색한 사이랄까.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가 대학생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는 틀에 박히고 고집스러운 옛날 시골의 노인 그 자체였다.


다른 친구들과 회사 선배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동네 경로당이나 탑골 공원에 가보기 전에 혹시나 하고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인터뷰를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건 적은 거의 처음이었기에 할머니는 무척 반가워했고, 흔쾌히 좋다고 했다. 친구들을 서너 분쯤 불러주실 수 있겠냐는 부탁에도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내려오기만 하라고 했다.


인터뷰가 제대로 안 되면 올레길이라도 걷고 올 생각으로 토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출발했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에 찾아간 할머니 집에는 이미 친구분들까지 모두 모여있었다. 할머니와 교회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라고 하고 했다. 할머니는 내가 오자마자 미리 준비했던 닭볶음탕을 끓여내서 밥을 차려주셨다. 할머니와의 만남이 어색할 것 같다는 걱정과 달리 아주 편한 시간이었다.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또 할머니가 깎아주시는 과일까지 먹고 나서 배가 터질 것 같은 상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 간 질문지를 꺼내고 녹음기를 켰다. 


Q : 21살 남자 대학생입니다. 저는 꿈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성적에 맞춰 대충 전자공학과에 들어오긴 했는데 딱히 재밌지도 않고, 앞으로 뭘 하고 싶다는 것도 없어요. 벌써 진로를 정해놓고 열심히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제가 한심해지고 괜히 불안해질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진혁, 21세)

A : 나는 살멍 뭐가 되고 싶은 꿈은 이날 이때까지 없었져. 국민학교 댕길 때는 어멍, 아방이 중학교만 보내주는 거, 시집가서는 자식새끼들 나처럼 작지 않게 우유 양껏 먹이는 거, 요새는 무릎만 좀 덜 아파시믄 하는 게 소원이자 꿈이였저게. 경해도 82살 까지 이렇게 잘 살아오지 않아시냐. 경허고 꿈이 없댄 행으네 그게 잘못된 인생은 아닌 거라. 다른 사람헌티 도둑질하거나, 피눈물 나게 허는 게 잘못된 거지게. 여지껏 살당보난 조급행으네 일을 그르치는 게 많아. 꿈이야 없다가도 생기는 거고, 있다가도 또 바뀌는 거난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 없다게. (강복순, 82세)


Q : 남자친구와 1년째 사귀고 있는데요. 저에게 너무 잘해주는 남친과 헤어지고 싶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남자 없다고 말하고… 저도 딱히 싫은 건 아닌데 연애하는 재미가 없어요. 제 마음이 식은 것 같아 이별하고 싶은데 괜히 놓치고 후회할까 봐 걱정이 돼요. 이 남자랑 헤어져야 할까요, 아니면 계속 사귀어야 할까요? (한이서, 22세)

A : 내가 80 가까이 살멍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우리 집 영감 한 사람밖에 못 만나본 거라. 우리 때는 처녀가 사내영 손만 잡으민 결혼해야 하는 걸로 알던 시절이었지마는 요새는 연애하는 게 흠 되는 것도 아닌디 많이 만나봐사주. 경허고 떠난 사람 후회되는 거는 어쩔 수 없다게. 착한 놈 보낸 다음에 못된 놈도 한 번 만낭으네 고생 좀 해봐야 사내 보는 눈도 트이는 거난. 시집가기 전에 실컷 만나보라. 나같이 할망되믄 하르방들 다 죽엉으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매! (김경분, 79세)


Q : 제가 유튜브를 시작하고 싶은데요, 아직 아이템을 못 정했거든요? 추천 좀 해주세요. (이지호, 23세)

A : (할머니에게 유튜브 설명) 아아… 핸드폰으로 보는… 그거? 그걸 니가 알아야지 나신디 물어보민 어떵허나게. 그냥 아무거나 니가 하고픈걸로 찍엉 올리면 되지. 겐디 하는 사람이 재밌는 걸 해야 나중에도 지겹지 않앙으네 계속할 수가 있는 거라. 그리고 그 뭐냐. 정치 얘기 하는 거. 그것만 하지 말라게. 할망, 하르방들이 자꾸 보내주는디 재미도 없고 시끄럽기만 허여. (양춘임, 80세)


이 외에도 많은 할머니들의 답변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사실 좀 뻔한 답이긴 해도 80년 넘게 산 할머니가 해주는 말은 왠지 모르게 오랜 삶에서 얻은 진리처럼 들렸다. 특히 우리 할머니가 가장 많은 답을 했는데,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밖에 관심이 없는듯했던 할머니가 젊은이의 물음에 이렇게 지혜로운 답을 해주는 모습에 살짝 감동하기까지 했다. 기사로 정리만 잘하면 팀장에게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 


인터뷰를 마치고 제주시에 사는 큰아버지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흑돼지구이 집에서 큰아버지와 사촌 형과 소주를 마시다가 할머니를 인터뷰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할머니를 노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할머니가 굉장히 지혜로운 분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큰아버지는 들고 있는 소주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하는 말은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자식들끼리 돈을 모아 할머니 생활비를 넉넉하게 보내드리고 있는데, 할머니는 그 돈을 아끼고 아꼈다가 홍보관이라고 하는 시골 노인들에게 정체 모를 건강식품, 자석요 같은 것들을 비싼 값에 파는 사기꾼들에게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 할머니들과 다단계를 시작했는데 규모가 커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할머니가 이모할머니 아들의 말만 믿고 투자를 했다가 여태껏 모은 돈을 다 날려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라고 했다. 다른 자식들에게는 창피해서 말하지 못하고 가까이서 할머니를 모시는 큰아버지에게만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며 거의 울상이 된 큰아버지 앞에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점심까지만 해도 지혜롭게 나이 든 여인이던 할머니가 실은 여기저기서 사기를 당하는 노파라니. 대부분의 삶에서는 지혜로운 할머니가 가끔 어리석어지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궁금해졌다. 어떤 모습이 진짜 할머니일까 혼란스럽다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어쨌거나 나는 기사를 쓸 거다. 학생들만 우리 할머니의 진실을 모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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