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화가 난 게 아니라 화가 난 척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 과잉이란 독

by 까짓것



가족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 하나가 있다. 사실 그때의 그 다툼과 분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보여지는 것만큼 심각하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정한 분노란 상황을 극적으로 몰아 표출시켜야 한다는 희한한 착각을 한 나는 보란 듯이 감정 과잉이 되었고 그렇게 지나치게 화를 내고야 말았다.


사실 화를 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서 이게 이렇게 까지 화낼 정돈가?”라는 의문이 생기곤 했다. 심리 전문가도 분석가도 아닌 내가 이러한 행위를 보고 내린 결론은 하나다. 나는 “감정 과잉”이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바늘에 찔리면 찔린 만큼만 아파하라”는 말이 있다. 지독한 자기 검열과 분석으로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친구와 다투면 다툰 것만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되는 거고, 상사에게 질책을 받았다면 혼난 것만으로만 반성하면 된다. 글로는 아주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겐 자신을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 ‘감정’이란 게 존재하기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대해 ‘과잉 해석’이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감정 과잉’도 동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 ‘감정 과잉’에 잠식되어 협상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며 갈등을 해결할 타이밍도 놓치게 된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수많은 기회를 놓치면서도 스스로는 알고 있다.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긴 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가 버리고 만다.

모 유명 가수는 우리들의 오늘날을 두고 “대혐오의 시대“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은 대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감정 과잉과 혼합되어 도를 넘는 지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을 댓글 창을 통해 지켜본 나는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화가 났지? “


라는 내로남불식의 반응으로 자기 객관화를 전혀 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으며 그동안의 흑역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은 일화는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연초 가족 간병으로 인해 고향에 내려가 한 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난 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덤덤한 편도 아닌지라 한 달 동안의 가족 간병은 지옥과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했었다. 그럼에도 꾹 참고 버틴 이유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돈'

그것이 또 다른 이유기도 했다.


한 달간 프리랜서 일을 접고 고향에 내려가 가족을 간병하다 보니 수고비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리 ”얼마를 주겠다,“ ”얼마 이상은 줘야 한다. “라는 가족 간의 사전 협상(?)이 없었기에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어렴풋이 얘기를 꺼냈고 가족도 알겠다고 응답했다. 업무의 난이도가 하드코어다 보니 최저시급 이상이 적용되길 바랐지만 그래도 가족끼리 그건 영 도리가 아닌 거란 생각에 마음속에서 깎고, 깎고, 또 깎아 100만 원만 받고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이 끝나갈 무렵, 그동안 쌓였던 수많은 감정들이 한순간에 터지면서 짐을 싸서 바로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당연히 수고비 100만 원도 안 받겠다며 일침을 놓았고 다시는 연락도 안 할 것이며, 내 인생엔 가족 따위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라 다짐한 채 비장한 마음으로 기찻길에 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엔 은행 알람이 나타났다. 300만 원이 입금되었다고 말이다, 난 다시 가족에게 그 돈을 입금했으나 가족은 고생했다며 수고비라고 받으라고만 할 뿐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를 거쳤을까, 결국 나의 최종 승리로 돌아갔다. 돈을 안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마지막 비장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 돈 안 받으니까 다신 연락 하지 마 “라고.


그 순간만큼은 이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고 두 번 다시없을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해 자취방의 문을 열자마자 신기하게도 모든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너무 했나? “라는 생각도 찰나 ”그냥 300만 원 받을걸 “ ”아깝다 “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다시 달라고 하자니 아무리 가족끼리라 해도 민망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싸운 원인을 돌이켜보니 영 유치하기도 했다. ”말을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해? “ 이것이 싸움의 원인이었다. 가족 평균 나이 50이 넘는다.


이러한 사소한 싸움이 결국 감정 과잉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 결과 가족 간병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다는 마음과 더불어 집을 나설 때 마주쳤던 엄마의 눈빛이 떠올라 죄책감이 느껴지며 눈물도 찔끔 났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죄, 그 죄는 300만 원을 잃은 것으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분노한 채 기찻길에 오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마음의 소리는 무시한 채 극단적으로 내 감정만 앞세우기 급급했다. 한 달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 심리가 비이성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미성숙한 태도는 후회, 나아가 허무로 이어졌다.


이날을 이후로 한 번쯤 내 성격에 대해 돌이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지난날의 사회생활이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놓친 기회와 협상들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분명 아니었다 생각하니 더욱 자괴감이 깊어졌고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유명한 빌런이 바로 나였던가 말인가?

바늘에 찔리면 찔린 만큼만 아파하라고? 맞는 말이다. 길을 걷다 넘어지면 넘어진 만큼만 속상해하면 된다. 가족과 싸우면 싸운 이유의 크기로만 분노하면 된다.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으면 상처받은 것만으로만 상처를 받으면 된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위해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되새긴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속상한 만큼만 속상해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가족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웅니... 그때 그 300만 원 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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