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소망한다. 공존하기를
90년생인 내가 개인주의자가 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그 말은 곧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이기를 자처하며 살았단 말인데 한참 친구들과 장난치며 교류해야 할 이 시기에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마음먹은 까닭을 다시금 돌이켜보니, 이거 솔직하게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사소하다.
체험학습을 앞두고 당일에 입을 옷을 구매하기 위해 보세 옷들이 즐비한 한 복합쇼핑몰을 간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나름 꾸미고 간다곤 했지만 기 센 사장님들의 기세와 눈빛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친구와 나는 조금은 유별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센 척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척은 기 센 사장님 앞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어봐도 되죠?” “좀 만 깎아주시면 안 돼요.” 등과 같은 당돌한 발언은 항상 마음속에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센 것이 아닌 센 ‘척’이었기에 사장님 앞에선 묘하게 긴장이 되었고 짬이 찰 만큼 찼던 그들의 눈엔 그것이 안 보일 리 없었다.
때문에, 센 ‘척’의 결말은 원하지 않은 옷을 강매당한 것으로 끝이 났다. 원하지 않은 옷을 구매한 것, 그것도 원가보다 비싼 가격에 ‘강매’당한 것이 스스로를 침울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약속을 어긴 친구에 대한 원망이 더욱 컸다. 분명 옷 가게에 들어가 사장님이 강매를 시도하면 서로 편을 들어주며 “깎아주시면 안 돼요?” “다른 옷 입어볼게요.” “더 둘러보고 올게요.” 등과 같은 말들로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기에 친구가 사장님과 대척할 때면 난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으로 친구의 싸움을 도왔다.
하지만 친구는 끝내 나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사장님과의 대결에서 완패한 나의 손엔 2배나 비싸게 산 강매당한 옷이 들려 있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사장님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한 나의 지질함에 대한 자괴감과 더불어 친구의 배신(?) 아닌 배신이 날 누구보다 서럽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 친구에게 늦은 시간 연락을 취했다. “내일 환불하러 가자!” “아니면 교환이라도 하러 가자”고 말이다. 그랬더니 친구의 답변은 냉정했다.
“차비 내 줄 거야?”
“차비 내 주면 같이 가 줄게.”
가까운 사람의 냉랭함이 더 무섭다 했는가? 절친한 친구였기에 그의 반응은 꽤 타격이 컸다. 나라면 같이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친구의 냉랭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 내 행동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나한테 화난 건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이러한 생각은 곧 태도의 검열로 자리 잡았다.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별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친구와는 졸업 때까지 원만하게 지냈지만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다. 사소하지만 당시 꽤 충격을 주었던 그날의 사건으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도 태도의 검열은 지속되었고 그 탓에 마음 맞는 친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후 방송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보수적인 분위기와 군기 문화에 순응하다 보니 선배에게 밉보이기 싫어 과도한 리액션과 정적을 회피하기 위한 아무 말 하기가 몸에 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에 피로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게 편해졌고 편함은 일상을 넘어 습관이 되었다. 사소한 검열을 통한 상대방 눈치 보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이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냥 스스로를 검열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맞는 직장 동료들과 진실게임을 하며 배 찢어지게 박장대소한 추억이 있고, 선배와의 트러블로 지하철역에서 큰 소리로 싸운 후, 울며불며 잘 지내보자며 서로 사과한 기억, 동료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땐 팀원 모두가 나서 상사에게 그만두겠다고 맞선 경험, 누군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 일처럼 나서 오지랖을 부린 기억 등이 그것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되돌아보기를 반복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누군가의 눈물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지지와 연대를 보낸 경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나의 사소한 진심을 알아봐 준 누군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똑같은 지지와 연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지지와 연대를 받았던 그 순간, 그 순간의 감정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럼에도 소망한다. 공존하기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악설을 맹신했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악으로 가득 찼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선설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인간의 본성은 따뜻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엔 나를 일어서게 하는 것,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분노와 원망이 아닌 우정과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20년간 그러했고 앞으로도 개인주의자로 살 것이라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소망한다. 세상과 공존하기를! 세상을 움직이는 건 단절이 아닌 바로 연대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