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순수 휴식

지워진 여름

by 단뎅

싹뚝.

잘라버렸다.


퇴사를 한 오늘 미리 예약해두었던 미용실에서 단발로 머리를 잘랐다.

내가 단발이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이 귀밑 5센치로 잘랐다.

바닥에 떨어진 까만 머리카락들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시달렸던 김 실장의 헛소리까지 같이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들어서자마자 잘랐던 단발머리 덕분에 목이 얼마나 시원했었는지 그 감각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바다 바람이 서늘하게 목 아래를 스칠던 그 기분. 그 여름방학에는 분명 나와 바다를 함께 가줬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는다.


단발머리로 잘랐다는 이유로 떠오른 그 여름방학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했다.

분명히 컵은 두개였고 웃고 있었던 기억은 남아있는데 왜 웃었는지는 알수없다.

방학 내내 혼자였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빠져 있다.

그사람은 단발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것 같기도 하다.

너무 평온해서 기억에서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상처도 각인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일지 모른다.


현재의 관계들은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상처를 해석하고 기억을 붙잡으려 애쓴다.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관계들이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기억 나지 않는 다는 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지워진 채 남아 있는 기억이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관계였다.

그 여름방학이 끝내줬던 이뉴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는데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았기 떄문이다.


바다는 얕았고 물은 맑았다.

파도가 밀려올때마다 모래가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발머리 사이로 바람이 잘 들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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