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고자 노력했던 32개월의 시간을 나름의 의미를 간직한 채 묻어두고 사회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준비하고 있던 공공기관 공고가 나기 전 예전에 일했던 복지관의 신규 관장님께서 이번에 사람을 채용하는데 지원자가 없다며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계약직이고 보수도 많지 않으니 중간에 다른 곳에 지원해도 서운해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양가 가족들이 2주에 걸쳐 번갈아 놀러 오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던지라 가족들 오는 기간을 무급 휴가로 빼주시면 지원하겠다고 했다. 아무리 무급이라도 솔직히 어느 직장에서 업무 중간에 2주나 휴가를 주겠냐는 마음에 그냥 던져본 거였는데 덜컥 그렇게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급 휴가를 주는 건 근로기준법 상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 이건 뭐 빼박이었다.
막상 그렇게 말씀하시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공기관 경력은 있으나 사회복지 중 사례관리 경력은 전무한지라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함께 일하자고 말한 선생님은 그 마음이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제안을 받았지만(엄연한 스카우트 - 흠흠 - 인 듯한데 계약직에 보수도 낮으니 스카우트이라기도 민망 ㅎ) 이력서와 자소서, 관련 서류는 제대로 챙겨서 지원해야 하기에 서류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력서 자격증 란을 채워 넣는데.. 우왕 그동안 내가 취득한 자격증이 12개나 되었다.
무슨 자격증을 이렇게 땄을까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다. 자격증을 위한 자격증 취득은 환경연구사 시험 보기 전 가점을 위해 땄었던 정보처리기사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 차를 운전하며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싶어서 땄던 운전면허증, 환경공학과를 다니면서 취득했던 수질환경기사, 취업해서 회사 언니가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 공부하다가 시험까지 봤던 사무자동화 산업기사, 울산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단순히 영화가 좋아서 친한 동생과 함께 연차도 내고 서울을 오가며 1년 넘게 몇 백만 원을 들여 재밌게 놀다 보니 어느덧 취득하게 되었던 영화치료 전문강사. 서울에 올라와 공공기관에 취직해 4년 가까이 다니면서 반복되는 야근과 과도한 업무량에 지쳐 이 길이 맞나 고민하며 내 직업에 대한 길을 찾고자 고민하며 공부했던 직업상담사 2급, 업무를 하며 홍보물을 바로 제작하고 싶은데 디자인 제작기술이 부족했던 아쉬움에 퇴사 후 서울 북부 기술교육원 북디자인학과(지금은 3D 프린팅 학과로 바뀌었음)에 다니며 익혔던 디자인 툴 -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 등 - 관련 자격증(GTQ1급, GTQ 2급, 전자출판 기능사,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 제주에 내려가 산다고 하니 공예협회장인 친구가 먹고 살 거 없으면 하라고 전문가 과정 교육해줘서 취득한 레진 아트 2급, 제주에 와서 집 근처 복지관에 다니면서 복지사 선생님들의 권유로 방송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고 스터디에 들어가 친구들과 놀며 공부하며 학위도 취득하고 졸업하던 해 합격한 사회복지사 1급 시험까지.
그리고 오늘 사회조사 분석사 2급 필기 합격 톡을 받았다. 내일부터 실기 공부 시작이다.
책 읽기와 공부를 싫어하는 내 동생은 나에게 '자격증 콜렉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누나는 공부가 그렇게 좋아?"
묻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공부하는 거였다.
자격증 12개를 따야지 결심한 게 아니라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며 발동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한 발 담가 보고 이왕 하는 거 자격증까지 따 볼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다.
첫 직장, 첫 이력서 쓸 때는 텅텅 비어있던 공간들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나는 사례관리 담당 사회복지사이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업무지만 행정업무는 환경부 지정기관, 공공기관을 거치는 기간 동안 눈 감고도 하게 되었던 일이라 바뀐 시스템에 금방 적응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이용자를 만나 상담하고 서비스를 연계하는 일은 처음이라 조심스럽지만.. 궁금하다. 이번 일 역시 나는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가려고 했던 공공기관 채용 공고가 났다.
난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공공의 자원을 민간에게 효율적으로 흘려보내는 협력 업무, 원 페이지 프로포절부터 회의록, 정부와 지자체에게 결과·성과·평가 보고를 계속해서 제출해야 하는 9할 이상이 행정인 무엇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이번엔 현장을 선택하기로 했다. 다른 곳에 지원해도 좋다는 관장님의 말씀이 있으셨지만 계약직도 엄연히 계약기간 동안의 약속이니까. 함께 일하는 선생님도 열정적이고 함께 잘해나가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인 데다 나와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춰 주어서 난 남기로 했다. 내가 또 한 의리 하거든.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고민했지만 기관과 동료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할게'라는 교만 버전이라면 이제부터는 솔직 버전.
내가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다.
배울 게 있거나, 재미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집에서 가깝거나. 나에게 정규직과 계약직은 직업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자격증을 취득하고 또 결과를 얻지 못한 수많은 실패들(도전의 시간)을 겪으면서 나의 시간을 조금 더 길게 보는 법을 배웠다. 나만의 기준으로 경력을 쌓아가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다음의 기회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것 또한 배웠다.
아직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지금의 업무는 두 가지를 충족시킨다. 배울 게 있고 재미도 있고. 아직까지는. 집에서는 차로 40분 거리라 꽤 먼 거리이지만 다른 직장에서 누리기 힘든 큰 장점이 있다. 바로 식당이 있다는 사실. 점심마다 메뉴 고민 안 해도 되고 맛도 있고. 물론 밥값은 월급에서 빠져나가지만 매일의 식사는 밥값 이상의 가치를 한다. 정말이지 식당 이모님들 최고!!
지금껏 나라는 인간 열심히 살았다.
어쨌든 호기심에 이끌려 자격증 12개 보유자가 되었고,
나는 멈추지 않고 또 한걸음 정진 중이다.
지나온 모든 시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이력서 한 줄을 채워갈 자격증 취득뿐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실패한 모든 시간들까지도 말이다. 그 실패의 시간들은 조금 더 단단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이다.
크고 작은 실패들을 더 겪고 싶다. 마치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계속 도전해 나가고 싶다. 목표가 생겼다. 호기심 가득한 할머니가 되는 것.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계속 많이 경험하고 많이 배워야지.
다음에는 자격증 목록이 아니라 실패한 목록을 들고 찾아와야겠다. "나 이렇게 많이 실패한 사람이야" 자랑하면서. 많은 실패는 그 보다 더 많은 도전을 의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