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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18. 2022

다시, 백조

다시, 글쓰기

지금 이 글을 보는,
자신만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게 맞다.
실수하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멋진 과정이며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만이 오랜 시간 바라 온 목표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은 없다.
그러나 꽃은 흔들려도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삶에 원치 않게 찾아오는 바람에 흔들려도
자신만의 향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중


다시,

자발적인,

백조가 되었다.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 동안 사회복지사로 생활하면서 느꼈던 많은 감정들과 겪었던 많은 에피소드들은 다른 글들로 만나기로 하고 현재 겪고 있는 나의 백조 생활을 공유하려 한다.


어제 복지관 분관 센터장님 부탁에 복지관 피난안내도를 작성해주는 일러스트레이터 자원봉사를 해주러 다녀왔다. 당분간 복지관과 엮이는 일 없이 몸도 마음도 푹 쉬고 싶었다. 봉사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지만 개인적인 친분으로 일을 도와주러 갔다. 점심 한 끼를 얻어먹고 일을 하고 있는데 복지관 본관 선생님이 볼 일이 있어 잠깐 분관에 오셨다. 나를 보고 "왜 여기 있느냐?"며 놀라시더니 "요즘 뭐해요?" 물어보셨다.

'하는 일은 많은데 뭐라 대답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센터장님이 "놀아요."라고 대신 대답했다. 물어봤던 선생님은 "어쩐지 얼굴이 폈더라. 부럽다. 나도 남편이 돈 벌어다주면 논다."며 본인도 쉬고 싶다고 부러워하셨다.


나는 이제 일정한 수입이 없는 백조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 않나. 백조는 결코 우아하지 않다는 걸.

꼿꼿한 백조의 자태 아래 발동동거림이 있듯 남들의 부러움 뒤에는 복닥거리는 나만의 일상이 있다.


업무를 할 때 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해놓고 필요한 것들이나 업무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일들까지 찾아서 해놓는 '사서 일하기'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 삶이야 오죽하랴. 물론 나의 최애 취미와 특기는 '뒹구르르 하며 먹고 넷플릭스, 티빙, 쿠팡 플레이를 보며 시간 죽이기'이지만. 나름 매일 빼먹지 않고 하는 루틴이 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을 보며 창문을 연다. 우리 집 안방 창문 블라인드를 걷으면 마당 가운데 커다란 팽나무와 텃밭의 채소들과 함께 집 나간 멍물이(길고양이이나 집고양이 같았던 댕냥이)가 지나가도 모를 세렝게티가 보인다. '저 잡초들은 언제 다 뽑지?' 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상큼한 초록의 커다란 싱그러움이 나를 반긴다. 눈이 맑아지고 시력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 화장실에 가서 간밤에 쌓인 노폐물을 밀어내고 항균비누로 손을 씻고 지저분한 양치컵 대신 손 바가지를 만들어 입을 헹군다.

- 수돗물을 받아 티포트에 끓이고 냉장고에 넣어둔 생수를 섞어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신다. 이거 생각보다 건강에 좋다. 꼭 다들 해보시라.

- 물티슈로 요가 매트를 닦는다. 물티슈 사용 줄여야 하는데. 걸레 빨기가 너무 귀찮다. 지구사랑과 귀차니즘 사이에서 매일 고민하다 귀차니즘이 이겨버리는 지못미 일상의 반복.

- 유튜브를 열어 빅씨스의 모닝 스트레칭 15분, 비타민신지니의 팔뚝 안쪽 살 빼기나 허벅지 안쪽 살 빼기 10분을 따라 한다. 이건 하루 권장 칼로리를 훨씬 넘어서는 나의 식습관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이다. 이거라도 안 하면 죽을 것만 같은 저질 몸뚱이에 대한 자위이기도 하고.

- 어제 저녁에 먹고 귀차니즘으로 아침까지 쌓여있는 설거지를 한 뒤 싱크대 청소를 한다. 여름에 하루라도 싱크대 청소를 안 하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안 하면 날벌레가 기승을 부린다. 녀석들 먹고살려고 부지런들 하다. 용감하기까지 하다. 들어오면 타닥이로 내가 백퍼 죽여버리는데. 사실 용감하지는 않구나. 너흰 우리 집이 처음이라 잘 모를 테니. 그냥 무지라고 해두자.

-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 청소를 한다. 게으른 나이지만 습한 여름에 하루라도 건너뛰면 화장실 곰팡이가 어느새 안녕한다. 난 너네랑 친구 하기 싫단다.

- 아침을 먹으며 큐티를 한다. 사실 큐티는 5분 하고 티브이를 한 시간 본다.  

- 이후의 시간들은 랜덤.


8월 1일 ~ 8월 3일 : 자가격리 기간 - 삼시세끼 밥 먹고 약 먹고 자다 일어나서 티브이 보며 뒹구르르

8월 4일 ~ 8월 12일 저녁 7시 ~ 9시 : '웹드라마 기획부터 편집까지' 수강

8월 12일 오후 2시 ~ 4시 : 제주 평생학습관 '내가 쓰는 소설 한 편' 수강

8월 16일 오후 : 이음 일자리 신청


공휴일에는 여보야랑 함덕 바다에 나가 돗자리 깔고 누워 제주의 바다와 바람을 만끽한다.

중간중간 영화관 가서 영화도 봐주고 블로그에 '단비의 오늘'이라는 주간 일기 챌린지도 틈틈이 적어준다.


사실 몸도 마음도 바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음만은 즐겁다는 것.


나는 나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에 대해 알 것이 많다. 알수록 놀랍다. 뭐 까도 까도 계속 나와. 양파는 끝이라도 있지. 끝을 알 수 없이 새로운 모습들을 계속 발견하다.

지난 5개월 동안은 나와 맞지 않는 일과 인(人)에 대해 알았고 덕분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 외의 것들에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깨달았다. 큰 수확이다. 감사하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을 꾸역꾸역 해내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며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다. 재미가 있거나 배울 것이 있거나 함께 하는 사람이 좋거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달랐겠지만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누구보다 나를 믿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가 생겼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에 또 불안이 찾아올 것을 안다. 7년 전 인생 계획서를 작성해 본부장님께 들이밀었고 퇴사 후 몇 년이 지나서도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다시 밥벌이에 눈을 돌렸다. 백조가 된 지금 여전히 제주도 공공기관 일자리를 기웃거리고 당장은 사회복지 거들떠보기도 싫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제주 복지넷에 들어가 어떤 일자리가 나왔는지 힐끗댄다. 제발 당분간은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한다.

어제 드디어 핸드폰에 주르륵 열려있던 제주도 공공기관과 제주 복지넷 일자리 탭들을 삭제했다.  


올해를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글쓰기 말이다. 올해 말까지 어떠한 결과물 하나라도 내어놓기로 나와 약속한다. 이 약속을 매년 한다. 내가 또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지.'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P타입의 사람이긴 한데. 쩝.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아무 결과물이 없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번 글쓰기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끝내지도 못하는 짝남 같다. 난 글쓰기에게 적극적인 대시 한 번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해보려고 한다. 남은 시간 누구보다 열심히. 내가 일하는 스타일 그대로 억대 연봉 직딩처럼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서. 억대 연봉쯤 되면 성실하지는 않아도 되려나. 어쨌든. 글쓰기 너 내가 제대로 대시하고 안되면 깔끔하게 접어줄게.


연 이틀 내린 폭우로 더위가 조금 가시는 듯하다. 거실 창문을 다 열어놨더니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고 창문에 걸어놓은 풍경이 나 좀 봐달라고 한 번은 땡깡 한 번은 딸랑거린다. 혜진이가 제주도 놀러 오면서 주고 간 선물이다. 고양이가 그려져 있어 멍물이 생각도 나고 저렇게 땡깡딸랑이는 소리가 예뻐서 소리 나면 가끔씩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다. 저 녀석도 소리를 내야 눈길 한 번 주는 나인데 아무런 결과물 없이 마음만 가지고 어떻게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래. 글쓰기를 위한 퇴사라 해두자. 그러니 글쓰기를 열심히 해보자. 다시.


나는 옳다.

나는 잘하고 있는 게 맞다.

바람이 부니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더 명확히 알겠다.



제주도 조천 함덕바다에서 유유자적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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