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한 국물이 절실한 1월의 첫 번째 메뉴.
서툴고 정신없는 와중에 가오픈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새해가 되었다. 이제는 해가 지날수록 바뀌는 숫자가 낯설다 못해 점점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게 되는 거 같다.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미래의 숫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가게 오픈준비를 하면서 몸도 머리도 많이 썼던 탓일까. 나는 유난히 올해 추위를 많이 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복도 껴입고, 따뜻한 차도 마시고,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며 잠이 들었지만, 작년보다 몸이 약해졌는지 힘도 없고 움츠러들고픈 마음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몸속 깊숙이 데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평소엔 밥순이답게 청국장 같은 찌개에 밥을 말아 푹푹 떠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샤부샤부나 전골, 만둣국 같이 국물이 듬뿍 담긴 음식들이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릇 밑바닥까지 다 마시고 나면 온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저 멀리 발가락까지 뜨끈해지는 국물요리 말이다. 엄마가 자주 데려갔던 백복령의 감자옹심이 집도 생각나고, 종종 엄마가 직접 해주셨던 수제비 생각도 났다. 수제비.. 그러고 보니 고거 참 오랜만에 듣는 거 같네!
마침 감자가루를 넣은 수제비를 만들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 1월의 첫 번째 메뉴로 정해보았다. 감자가 들어가면 구수한 향도 있을 거고, 우리밀도 넣어서 고소하고 쫄깃하게 만들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캬.. 군침!)
얼마 전 서울에서 무와 순무를 활용한 발효 요리 워크숍을 듣고 왔는데, 채소가 귀한 겨울에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도 봄무가 있고 가을무가 있는데, 봄무에 비해서 가을무가 훨씬 더 달고, 바람도 잘 들지 않아 보관도 오래가며, 섬유질이 질기지 않아서 김치를 담가도 봄무에 비해 쪼글거리는 게 덜하다는 농부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무는 겨울철에 먹을 수 있는, 정말 효율적인 최적의 구황작물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이번 1월에 함께 나갈 오늘의 메뉴와 꼭! 짝꿍을 해주고 싶었다.
계절이 자연스레 바뀌면서 내 몸이 원하고, 땅이 기름지게 내어주는 것들로 1월의 메뉴를 꾸리게 되면서, 자연스러움 앞에서는 그저 함께 흘러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함께 흘러가보는 것. 내가 문경에 오고 이렇게 가게를 열게 된 것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연결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으슬으슬 추위로 힘이 점점 빠지는 육신을 달래고, 다시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 나는 '감자수제비와 순무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1월의 첫 번째 메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채수를 우리기 위해 무 하나와 양파 2개를 통째로 솥에 넣고, 말린 애호박 한 줌, 다시마 큰 거 1조각을 넣어 팔팔 끓이기 시작했다. 식당을 하다 보니 꽤나 큰 솥이 하나 필요해서 장만해 두었는데, 이렇게 채수를 우리는데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네! 덩치 큰 솥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가서 팔팔 끓고 있으니 그나마 동네 식당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로컬매장에서 구입한 봉평촌의 감자수제비 가루 한 봉지에 우리밀을 1/3 정도 섞어서 반죽하고, 한 시간 이상 숙성을 해준 후, 팔팔 끓는 채수에 소금 간을 하고, 하나씩 수제비를 떠서 퐁당퐁당 담가주었다.(수제비 반죽을 넣기 전에 감자를 송송 썰어서 미리 넣어주어도 좋다) 표고버섯과 봄동 배춧잎을 썰어서 넣고 한 솎음 더 끓여 준 후, 무를 갈아서 감자전분 섞은 것을 2큰술 국물에 풀어주면 완성! 마무리 간은 간장으로 살짝 해줬다.
무를 갈아서 국물에 풀어주는 것도 무와 순무 발효 요리 워크숍에서 얻은 팁이다. 무의 좋은 성분들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돕는 요리법이라는 말에 이번 감자수제비에 응용해보고 싶었다. 국물이 살짝궁 걸쭉해져서 심리적 포만감도 주는 것 같고, 무엇보다 그냥 밍밍한 국물보다 접시에 수제비를 담았을 때 참 이쁘다는 것! 영양학 적으로도 참 지혜롭고 비주얼 적으로도 훌륭한 요리법 같다.
수제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반찬으로는 강화순무를 적극 이용했다. 사실 나는 순무를 전혀 모르고 살다가 서울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면서 서른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순무를 맛보게 되었는데, 그때 먹었던 그 강화순무의 맛이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흰 무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매운 향, 좀 더 개성 있는 맛 덕분이었는지, 순간 왜 우리 엄마는 단 한 번도 이런 김치를 해준 적이 없었지?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강원도 태생인 나는 순무를 한 번도 구경했던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강화순무로 빨간 양념을 한 김치도 담가보고, 물김치와 소금절임도 해보고, 워크숍에서 배웠던 교토식 센마이즈케도 만들어보았다. 농부님께 강화순무 10kg을 샀는데 이것저것 만들며 썰고 절이고 담그고 했더니 하루 만에 순무 한 상자를 다 쓰게 되었다. 부디 순무의 맛이 잘 익기를 바라며, 나는 하루 종일 강화순무를 다듬으며 순무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여러 가지김치를 담그다 보니 맨날 얻어먹기만 했던 엄마에게 꼭 한 통 주고 싶었다. 매일매일 유산균을 다독이고 잘 보살피며 맛있게 익혀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실온에서 익히는 김치들은 시간을 더 필요로 했고,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빨간 순무김치가 살짝 보글거리며 김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번 주에 손님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하고 맛이 괜찮은 건가? 싶은 마음에 계속 하나씩 집어먹기를 반복하며 김치통 뚜껑을 들춰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식당을 개업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해구나. 추위와 공존하기 위해서 나를 보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땅이 보살펴주는 작물들을 탐구하게 되는 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