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쓸 만한 조과장 Apr 07. 2020

술 먹고 무언가를 토해버렸네

가슴속 어딘가 방치된 감정들

지난 금요일, 오랜만에 회사 친한 선배와 둘이 술 한잔했다.


금요일 다섯 시에 만나 회사 근처 양갈비 집에 가서 칭다오 하나에 양갈비를 시켰다. 할 얘기도 많았는지 맥주 1병을 금세 다 비우고 소주를 깠다. 한병 두병, 그렇게 우리는 총 소주 6병을 깠다. 둘 다 주량이 그렇게 쎄지는 않은 편인데 오늘은 왠지 술이 잘 들어간다며 소주 6병을 다 마시고 나왔다


참고로 내가 아는 내 주량은 소주 2병 정도이다. 주량이라는 기준이 지역,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몸이 알딸딸해지고, 더 먹으면 속에서 토가 나올 거 같고, 잠도 슬슬 오고, 몸에서 술을 거부하는 단계라고 본다. 근데 그날은 정말 평소보다 술이 잘 들어갔다.


선배와 헤어지고 나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10년간 쌓아온 귀가 본능을 발동하여 집에 잘 도착하였다. 대신 전달 마신 술기운으로 다음날 오전 내내 방안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다음날 아침에 토를 하거나, 술 먹고 다음날의 찝찝한 기분은 없었다. 오히려 정신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술로 아픈 속을 진정시키며 전날 선배와 술을 마셨던 순간들을 떠올려 봤다.



선배와 알고 지낸지는 3년 정도 되었다. 미생에 나오는 장백기를 쏙 빼닮은 듯한 외모와 뭔가 있는 집안에서 자란듯한 반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잘 삐지기도 하고 순수한 면이 많은 동네형 같기도 하다. 이 선배와 술을 마시다 보면 던지는 말속에서 간혹 감동을 받기도 한다.


"최근에 힘들일도 많았을 텐데 그래도 티 안 내고 회사 다니는 거 보며 술 한잔 먹고 싶었다"


"출근하면 네가 보낸 메일이 3통씩 쌓여있더라 6층 사람들은 적어도 일 많이 하는 거 다 안다"


"내가 최근에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받았는데, 네 생각이 너더라"


그날도 술을 마시며 툭툭 던지는 말들 속에서 평소에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느꼈다. 나는 '회사일이 얼마나 바빴는지', '작년에 같이 있었을 때 지나가 보니 그리웠는지' 등등 못다 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한참을 얘기하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났다


"아니 야 너 왜 우는데 갑자기, 그러면 나도 울게 되잖아"


어떤 포인트에서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기억나는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말할 수 없어 힘들었던 내 속마음들이 구석 한편에 오래 방치됐다고는 느꼈다. 방치한 속마음들이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려다 보니 홀로 나오기는 힘들어 눈물을 머금고 나오게 되는 거 같았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술을 좀 과하게 마셨다. 눈물을 삼키기 위해서도,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도, 고생했다고 위로해주기 위해서도, 여러 이유들로 술이 좀 더 필요했던 거 같다. 감정을 다 토해내다 보니 더 이상 토해낼 게 없어 먹은 음식은 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술을 먹을 수 있게 된 나이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이래저래 술을 많이 마신 거 같다.


"처음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술을 내가 잘 마신다고 생각해서 술을 마셨고,  먹다 보니 친구들과 쌓이는 우정이 즐거워 술을 마셨고, 그러다가 내 몸이 아프면 술을 끊었고, 그러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하면 또 술을 마셨고, 앞으로는 안 먹겠다고 하다가, 또 홀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잠깐 동안 안 먹은 적은 있었지만 10년 간 술은 내 인생을 이곳저곳에 자취를 남겼다. 사람들마다 술을 마시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은 마음에서 술을 마시는 거 같다.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 공허함, 슬픔, 상실감, 불안함, 그리고 수많은 걱정들과 일상의 고통, 말할 사람도, 말할 시간도 없고, 그냥 털어놓자니 지금 분위기만 망칠 거 같은 나만의 이야기들, 도저히 내 마음의 공간에는 이제 들어갈 공간이 없는 말들이 술의 힘을 빌려 나 혹은 누군가에게 토해내고 싶은 거 같다


월요일 아침 선배가 '소주 3병 이상 먹으면 간암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기사를 보내줬다. 나는 '그래도 후회 없이 잘 마셨노라고 덕분에 훌훌 마음을 털고 왔다고'도 답장을 줬다. 다음에는 이렇게 먹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지만 잘 모르겠다. "토해낼게 조금 적어지면 술도 적어지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텔레그램 N번방을 통해 본 우리사회 모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