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토 멘토를 한 지 1년 반 정도가 됐다. 1년 반 정도 하며 달라진 점은 멘티들에게 전하는 말이 조금은 솔직해졌다는 거다. 초창기 강의할 때는 멘티들에게 '잘할 수 있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취업을 뚫고 가는 게 바늘구멍인 세상이다. 안 그래도 힘들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격려를 줄 수 있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1년쯤이 되었을 때는 조금은 현실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고, 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분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내 역할은 그들에게 무기를 주어주는 대장장이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사탕발린 말로 무조건 잘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더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의 마인드로는 너는 취업을 할 수 없다'라고. 사실 이 말이 냉혹하지만 현실이다. 절실하지 않으며 취업할 수 없다. 강의 초창기 때부터 잘 될 학생과 안 될 학생을 마음으로 점찍기도 했다. 단지 그들과 잘 지내고 싶은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에 나와 회사에 들어가면 현실은 더 냉혹하다. 물론 간혹 나를 생각해서 진심 어린 팩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직장동료와 논쟁 없이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착해 보이고 좋은 동료 같았지만, 지금은 그냥 착한 가면을 쓰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직장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힘든 세상에서 더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착한 가면을 어느 정도는 쓰고 다니기 때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쓰디쓴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거만하게 누군가를 평가할 자격이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말들이 불편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위로받으며 성장해왔나?. 이렇게 위로를 해주면 다 괜찮은 것일까?
신입 때는 이래저래 못 먹는 술을 많이 먹었다. 힘들 때 술을 먹으면 자연스레 마음의 담아뒀던 소리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되는 업무, 아는데 또 실수해서 혼나는 일상, 정말 이게 내가 가려는 길이 맞을까 하는 회의감들이 술과 함께 토해져 나왔다.
신입 때는 이렇게 힘들 날에 술을 빌려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거 같다. 이렇게 위로를 받으면 그래도 집에 들어가 잠은 쥐 죽은 듯이 잘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위로를 받으면 뭔가 그래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해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회를 경험할수록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받는다고 해서 결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로는 달콤한 독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상황에서 머물러서 지내도 괜찮다고 말하는 독, 우리도 이렇게 지내는데 너도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는 독 말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힘들고 바닥에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쉽게도 주변 사람들의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 바닥에 떨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이다. 바닥이 있을 때 일으켜 세운 것은 나 스스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힘들지만 나 자신과 싸웠던 순간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는 종종 큰 힘이 되지만 지금의 힘든 상황을 결코 바꿔주지 않는다. 주변 사람이란 별과 같아서 내 빛이 바래지면 그 주변에서 더 빛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물론 항상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잘되기를 바라는 가족과 연인처럼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주변 사람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다.
주변 사람들이 '뭐하러 혼자 이렇게 끙끙 앓냐고, 조금은 마음을 열어두고 얘기하면 편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같이 그들과 어울리며 편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 홀로 있을 때 스스로 강해지고 성장했다.
결국 별도 주변 별이 빛날 때가 아닌 스스로 빛날 때가 더 멋있지 않을까?
지금 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하지 못한다. 지금 주저하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지금 두려워서 조금 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찾다 보면 그 길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그냥 해야 할 때는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위로보다는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해갈수는 삶의 원동력이다.
내가 취업할 때 최종 경쟁률이 200:1이라고 말하면 불안해하는 멘티들이 있었다. 물론 현실에는 이것보다 더 높은 경쟁률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경쟁률에는 간과되고 있는 오류가 하나 있다. 바로 자격요건이다. 내가 들어간 회사는 자격요건이 '자격제한 없음'이었다. 즉 누구나 대졸생이면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쟁률에는 허수가 많다. 공공기관 중에 최종 경쟁률이 40:1이거나 그 미만인 기업들을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쟁률이 낮은 곳은 어학 등 서류전형에서 자격요건을 두거나, 필기나 면접전형에서 다른 기관에서는 잘하지 않는 논술이나 면접전형을 두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 단순히 공공기관을 가고 싶은 지원자 입장에서 물어보자. 경쟁률로 봤을 때 어떤 것이 유리한가? 200:1보다는 40:1이 유리하지 않는가? 경쟁률만 보고 취업이 힘드네, 헬조선이네,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하네 라고 생각하기 말하기 전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대는 정말 이 시장에서 싸우기 위해 얼마만큼 준비가 되어있는가?
마음은 따뜻하게 살려고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냉혹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매 순간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 위로를 찾기보다는 유튜브로 동기 영상 하는 일타강사의 팩폭 영상이라도 들으며 출근한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매 순간 다짐하고 생각한다.
세상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몇 년 전에는 AI니 3d프린트니, iot니 해서 세상을 바꾼다고 하더니, 지금은 메타버스니, nft니, 디파이를 모르면 안 된다고 한다. 두렵고 지치지만 간과해서는 안된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필요한 것을 공부하는 것 뿐이다.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위로의 시대에 살고 있을지 언정 위로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위로를 받고 싶은 분들에게 위로를 드리지 못해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을 직시하면 좋을 거 같다. 우리가 좋아하는 동경하는 사람들도 위로를 받으며 올라간건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