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부터 비실대던 박쥐란이 죽었다. 해와 바람을 좀 맞고 건강해지라고 봄부터 데크에 내놓았는데 너무 늦었나 보다. 죽은 식물과 흙을 모두 비우고, 토분을 닦아 말렸다. 화분이 너무 많아 터져 나갈 것 같던 데크에 공간이 아주 조금 생긴 셈이다.
잔잔한 꽃이 만발했는데도 자리가 없어 구석진 곳에 있어야 했던 다이아몬드 프로스트를 박쥐란 자리로 옮겨주었다. 자리만 바꿔주었을 뿐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제법 여러 번 꽃 이름과 가격을 물어왔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노트북으로 매입, 매출을 정리하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밖에서 꽃구경을 하시는 것 같았다. 동네 이름도 ‘전원마을’인지라 연세 지긋한 분들이 많이 사셔서, 오늘도 그냥 꽃구경하며 지나가시는 동네 분이리라 생각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참이 지나서 손님 한 분이 가게로 들어오시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그 할머니였다. 아는 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오셨다. 아는 분 인줄 알았으면 얼른 나가서 인사를 드렸을 텐데 많이 야위셔서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살갑지 않은데도 우리 가게를 예뻐해 주시고, 가끔 들르셔서 친구들과 며느리들에게 선물할 꽃을 사시는 멋쟁이 할머니다. 친구분들과 함께 구경을 오시기도 하고,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이런저런 근황을 전해 주셨다. “요즘 왜 안 나오시지?” 생각하고 있던 터에 한 번 들르신 적이 있는데 예전보다 기력이 많이 떨어져 보이셨다. 집 바로 앞인데도 요기 나오기가 그렇게 머시다며… 그리고 한참만에 나오신 게 오늘이다.
오늘은 다이아몬드 프로스트가 눈에 들어오셨는지, 그걸 사신다 하셨다. 깔끔하게 정돈해서 댁으로 가져다 드리기로 했다. 화분을 닦고 미운 잎을 떼며 할머니가 나오지 않으실 걸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안된다, 안된다 고개를 저으며 기력을 빨리 되찾으시기를 빌었다.
할머니 댁 창가에 화분을 놓아드리고 나니 커피를 먹겠냐고 물으셔서 뻔뻔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자녀분들 이야기, 편찮으셨던 얘기, 평생 해오던 운전을 그만두고 차를 파셨다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고, 배달 온 식료품 박스를 주방으로 옮겨드리고, 손님맞이가 길어지면 너무 힘드실까 봐 서둘러 돌아왔다.
좋은 일을 했다고 우쭐대려는 게 아니다. 낯은 가리지만 정든 고객과의 시간을 통해 나도 위로를 얻는다. 할머니께서 다시 건강해지셔서 전처럼 성당 친구분들 여럿 대동하고 오셔서, 데크에 놓인 꽃과 식물을 보며 서로 얼마나 많은 식물을 잘 키웠었는지 은근히 자랑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우리 가게도 계속 예뻐해 주시기를.. 다시 오시면 예쁜 들꽃을 선물로 드려야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