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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May 30. 2023

흑백 논리의 늪에 빠져 있었다

적당히 해라

우리 엄마처럼 ‘적당히’와 ‘중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저녁밥을 만드는 자잘한 일부터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뭐든 적당한 것이 좋다며 과한 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고봉밥을 먹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적당했다.


반대로 나는 중간이 없었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뭐든 과했던 쌈닭이라 아빠와 동생. 둘과 번갈아가며 투닥거리기 바빴다. 웃기게도 엄마는 그 사이에서도 항상 중간의 역할을 자처하여, 중재자가 되어주곤 했다. (생각해 보면 적당히 하란 말은 조금 과하게 들은 듯하다.)


나에게 ‘중간’, ‘적당히’는 참 애매하고 싫은 말이었다. 좋은 것은 한없이 좋았고, 싫은 것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 한 번 몰입하면 기세를 몰아 어떻게든 억척스럽게 끝내야만 했고, 싫은 것은 하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음식을 만들 때도 그놈의 ‘적당히’가 안돼 망치기 일쑤였다. 중간 모범생인 엄마는 적당히 하라며 내 귀에 박히도록 잔소리했지만 어려웠다.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것이란 굉장한 자제력과 집중이 필요했다.


좋고 싦음이 분명한 것. 그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에둘러 말하기보단 뚜렷하게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나 또한 항상 명확하게 대답하길 선망했다. 누군가가 만든 정답에 따라 앵무새처럼 대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라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엄마!라고 외쳤고, 그게 옳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희미한 웃음을 모른 척하곤.


중간 없는 성격은 집중하는 일에 용이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 일에는 언제나 좋은 결과물이 있었다. 그래서 중간 없는 성격은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흑백논리로 가득 찬 내게 ‘좋은 실패’, ‘나쁜 성공’과 같은 아이러니하고도 애매한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성공은 성공이고 실패는 실패지.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었다. 그리고 결국 걸림돌이 되었다. 그 성공은 ‘나만의 성공’으로 자리 잡아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실패는 '끝없는 실패'로 남아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했다. 내 주위에는 나쁜 친구이거나 좋은 친구만 남아 모든 것이 흑백으로 구분되었다. 좋은 사람으로 각인된 나만의 친구를 감히 미워할 순 없었고, 나쁜 친구의 색다른 면을 보길 거부했다. 선을 그을수록 더욱 모호해지는 기분이었다.


구분되지 않는 것들은 그것 만이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도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고독하지만 아무도 만나기 싫은 기분, 슬픈데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 미워 죽겠지만 보고 싶은 사람. 그런 뒤섞인 중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결국 그 애매함 앞에서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둘 다 좋죠’라고 하거나 ‘에이, 그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왜 그 애매함을 못 견뎠을까. 줏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 모호한 경계에 있을 때 내가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세상에는 독이 되는 성공도 있었고, 괜찮은 실패도 있었다. 뒤섞인 중간들을 배우며 엄마가 귀에 박히도록 말하던. 애매함과 어정쩡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색깔은 검정과 하양 이외에도 RGB, CMYK로 구분되는 수많은 컬러 코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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