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terflies in my stomach
고등학생 때, 배가 자주 아팠다. 그놈의 시험 때문에. 시험이 많기로 유명한 우리 학교는 매주 세 번의 시험을 봤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따로 있었다.
그렇게 쫓기듯 지긋지긋하게 시험을 봤지만, 시험 전에는 매번 배가 아팠다. 위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뒤틀리는 기분이었는데, 배 안에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미국식 표현보다 더 명확한 표현은 없었다.
너 그거, 신경성이야.
엄마는 신경성이라고 했다.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거라니. 그래서인지 중요한 시험 전에는 배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내 복통을 간절함과 열정의 척도로 여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학에 들어가서는 배가 아픈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별로 없었다. 평범한 학교 생활이었다. 그러던 중 알싸한 복통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러낸 날이었다.
자네, 잠깐 나 좀 보고 가지
그 수업은 매주 쪽지 시험을 보는 특이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 하지도 않는, 크게 눈에 튀는 학생이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왜 부르시지.
학생들이 우르르 나가고, 강의실에는 교수님과 나만 남게 되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시던 교수님은 내게 다른 학생들의 쪽지 시험 성적을 살짝 보여주셨다.
높은 성적과 낮은 성적이 뒤섞인 크게 놀라운 성적표는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다. 어느 날은 운 좋게도 백 점이었지만 또 어느 날은 백지 수준이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성적에 매주 비슷한 성과를 내는 반면, 내 성적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들쑥날쑥했다.
성적에 포함되는 시험인 만큼 다들 치열하게 공부하는 반면, 교수님이 보시기에 나는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전공 공부가 싫은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바쁘기라도 한 건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꽤 오래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네가 이것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건 그냥 답례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에 비하여 대학교 시험은 한결 수월했다. 크게 배가 아픈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쉽지 않았다. 친구도, 연애도, 공부도 모든 것을 잘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에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도 하고, 알바에 치여 살다 흥청망청 술을 사 먹고 겨우 수업에 출석하기도 했다.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과연 나는 최선을 다한 걸까. 나는 차마 교수님께 ‘열심히 할게요’라는 정답을 드리지 못했다.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교실을 나왔다. 명치 부근이 꽉 막혀오더니 배 안이 알싸했다. 머리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나와 점심을 같이 하기 위해 기다리던 친구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최선을 다했어?
아직도 나는 그 유치하고도 쉬운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나를 위해 행복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걸까. 서점에는 성공을 강요하는 책과 강요하지 않는 책이 겨우 두 발자국 거리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베스트 에세이를 전시하는 한 켠에는 ‘오늘도 수고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류의 책들이 나열되어 있고, 바로 옆쪽에는 ‘미라클 모닝’, ‘1%의 습관’과 같은 열정과 노력에 대한 자기 개발서들이 즐비해 있다.
이 당근과 채찍 같은 모순 속에서 과연 어떤 것이 정답일까. 밤낮을 지새우지만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난다는 지구 반대편의 하버드생. 그리고 작은 일에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고양이처럼 살아가겠다는 인기 에세이 작가. 이도 저도 아닌 그사이 어딘가쯤인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역시 열심과 최선은 내게 너무 무겁고 어려운 단어다.
이후 어느 봄,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배 안쪽에서 오랜만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전히 적응할 수 없는 통증이지만, 시험 전보다 한 겹 성장한 나를 발견한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레는 기분은 덤이다.
나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했다’라고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시험 전보다 성장한 내가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주기적으로 배 안에서 퍼덕거리는 나비를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더라도 ‘수고했다’라는 말은 아낌없이 하고 싶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