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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 그리고 모래성 쌓기

이수 05

by 프랜들리

스튜디오는 어두웠다. 군데군데 세워둔 조명이 눈을 찔렀다. 바닥에는 굵고 가는 케이블이 뒤엉켜 있고, 스태프들이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휴대폰을 보니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다.


나는 프리랜서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촬영 스케줄은 들쑥날쑥해 오늘처럼 밤샘 촬영을 하는 날도 있지만, 취준생에게는 꽤 쏠쏠하다. 현장에서 간단하게 통역을 하는 일이라 크게 힘들지도 않고, 무엇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처음에는 여러 에이전시에서 일을 받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일이 벅차 대부분은 친분을 튼 한 곳에서 업무를 받는다. 이번 주는 일정이 빡빡하기도 하고 새벽 촬영이 많아, 여차하면 몇 건은 거절할 참이었다.


스테프들이 바쁘게 오가는 사이, 나와 내가 앉은 소파만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촬영의 절반은 대기다. 미리 받은 타임 테이블에는 풀데이 촬영이라고 적혀있어 어느 정도 각오했지만,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러다 소파의 일부가 되더라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고개를 젖히니 높은 천장이 보였다. 밤이 되니 급격하게 추워졌다. 코를 훌쩍이며 가디건을 걸쳤다. 스튜디오는 대체로 천장이 높다. 처음엔 이런 공간에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사실 빛 좋은 개살구다.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부분만 완벽하고, 그 외에는 조명에 부딪히는 나방, 페인트칠이 벗겨진 천장, 쓰지 못하는 예쁜 소품뿐이다. (이 소파도 렌탈일 것이다)


여기서는 감독 외엔 모두가 '실장'이다. 이름이나 나이, 사는 곳을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오늘 이후 다시 볼 일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다른 촬영장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결국 남는 건 잘 만든 영상 한 편. 그 뒤에서 누군가는 언성을 높이고, 지루한 시간을 감내하고, 먼지 낀 케이블을 꺼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여름밤의 꿈같다.




휴대폰은 잠잠하기만 하다. 이수는 지금쯤 자고 있겠지 싶었다. 며칠 전엔 크게 다퉜다. 만나기로 한 날, 그가 갑자기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그 말에 갑작스러운 짜증이 일어 언성을 높이다 전화를 끊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화낼 건 없었는데, 어쨌든 이미 화는 내버렸고, 지금은 먼저 연락하면 지게 되는 걸까 생각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제대로 크게 부딪친 건 오일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다. 늦은 밤, 이수가 내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당황해 곧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재차 걸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 시간에 무슨 전화?"

아무도 아니라고 다급하게 대답했지만 이상함을 느낀 이수가 캐묻기 시작했고, 결국 전 남자친구라고 실토하게 되었다.


“왜 거짓말을 해? 아니, 왜 차단 안 했어?”

“연락한 적이 없으니까. 나도 당황스러워.”

“지금이라도 차단해. 아니, 그전에 핸드폰 줘봐.”


나는 나대로 억울했지만 그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그는 내용을 훑어보고 대화방을 나간 뒤 다른 메시지까지 훑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별 내용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내가 이런 걸로 신경 쓰게 한 적 있어?”

“너 같으면 의심하지 않겠어? 난 진짜 너가 왜 차단을 안 해놨는지 모르겠다”

말은 계속 제자리만 돌았다.


“너랑 있을 기분 아니야. 나 집 갈게”

그가 돌아간 뒤, 싸늘한 방. 기분만 제대로 잡쳤다.




팅. 팅. 나방이 조명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조용한 걸 보니, 지금은 현장 녹음을 따고 있는 듯했다.


누가 잘못했든, 결국 자존심이 더 중요한 우리다. 양보 대신 침묵하고, 먼지 낀 현실은 외면한다. 진부하기 짝이 없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건 정말 큰 착각이다. 우리가 쌓아온 건 추억이나 믿음, 그런 게 아니라 파도 한 번에 쓸려버리는 모래성 같은 것이다. 허상 같은 것. 참, 시간 낭비다.


스트디오가 추워 코끝이 찡했다. 스태프가 다가와 들어갈 타이밍을 알렸다.


"코가 빨개요. 어디 아파요?"

"감기 기운인가 봐요. 여기 너무 추워요."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이젠 궁금해하지도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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