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났다

이수 06

by 프랜들리

음악학원, 온누리약국, 내과의원.

상가 간판들이 이어졌다. 버스 창 밖은 밝고 평화롭다. 햇살이 닿는 곳마다 반짝거렸다.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지난 며칠을. 끔찍하리만큼 더딘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금세 지나갔다. 시간은 느리고 또 빠르다. 그 아이러니가 당연하면서도 우스웠다.


시간은 점도가 높은 어떤 액체 같았다. 무언가가 아주 느리고 끈적하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어느 밤에는 그런 기분을 참을 수 없어, 불쑥 야밤 조깅을 나가기도 했다.


'소용없어'


일주일 전, 이수는 그렇게 말했다. 마음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기로 했고, 오늘이 그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에어컨이 도는 버스 안은 추워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날씨 얘기를 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날씨 좋다고 하면, 이수는 그러네, 하고 대답하겠지.


그럴 땐 좀 더 성의 있게 대답해 줄 순 없나 싶으면서도, 원체 모든 걸 단순하게 대답하는 그 말투가 익숙해서 안도하고 만다. 익숙해졌다는 것. 그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기분을 가볍게 만든다.


익숙함. 어쩌면 그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얼굴을 보면 이내 안심하고 마는 것.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가 중요하다가도,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그를 발견하는 순간 경계가 모호해져 버린다. 또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에 다시 이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다 누군가는 그게 지긋지긋해져 버리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한쪽이 돌아서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퇴색된다. 어제의 트로피가 한순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 남은 쪽은 질척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의 삶에서 눌어붙은 존재가 되는 것. 잔인한 일이다.


왜 이수여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는 없다. 그저 이수가 아니면 안 됐다. 그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이수가 없는 나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면서 정류장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나는 공포를 느꼈다. 곧 이수를 만난다. 생각들이 쓸려 내려가고, 현실로 돌아왔다. '나 거의 다 왔어' 우선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깨와 스웨터. 반듯이 앉은 자세. 그 위로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커피잔에 매달린 굵은 물방울을 바라봤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굵은 물방울은 천천히 떨어지더니 이내 다른 물방울과 합쳐져 주르르 떨어졌다.


"우리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거 같아. 그렇지?"


그런 말을 듣는 순간에도 나는 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공연이라도 보듯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끝나버렸다.


유치한 노래, 커피 가는 소리, 수다 소리가 이수가 나간 공백을 채웠다. 그는 이곳에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서야 눈물이 터졌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신촌에서 크리스마스에 본 커플이 떠올랐다. 여자 손엔 쇼핑백, 남자 손엔 케이크. 말없이 마주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여자는 울기 직전이었다. 내가 구경하고 가자고 했을 때, 이수는 내 팔을 끌며 돌아가자고 했다.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흰 타일, 누렇게 변색된 천장의 화장실 한 칸.

코가 붓고 관자놀이가 두근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천장에 누렇게 뜬 물자국이 눈에 익을 대로 이 공간에 오래 있었다.


이 공간은 지금 내 상황과 닮았다. 우울하고 지저분하다. 이대로 화장실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눈가를 휴지로 콕콕 찍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똑같은 색감을 띄고 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밝고, 맑다. 부어오른 코 그대로, 정류장으로 갔다. 어깨로는 가방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안에는 이수가 준 노트북. 여차하면 주려고 한 반지가 있다. 처치곤란이다.


생일 선물로 받은 노트북은 로즈골드 색이었다. 헉, 무슨 노트북이야. 그러고 보니 그가 준 건 좌다 핑크빛이었다. 여자라서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걸까. 나 무슨 핑크 공주 같잖아하고 툴툴대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 핑크공주 맞잖아. 내가 좋아해서 그래, 핑크색.


정수리가 타는 듯했다. 이런 기분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매미 우는 소리와 찌는 열기가 엉망으로 뒤엉킨 날이었다.


- 이수 END -


keyword
이전 22화한여름밤의 꿈, 그리고 모래성 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