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_은희경
우리 독서모임의 1월 선정 책은 은희경 작가의 소설이다. 지난달 내가 고른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책 때문에 모두들 고통받았던 것인지 이번 달에는 쉽게 가자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선정되었다. 은희경 작가의 책은 고등학생 때 한번 접해보고는 좀 어렵다 생각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 그랬던 것인지 은희경 작가의 소설이 어른의 것으로 나와 맞지 않다 생각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은희경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잊고 지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어느 문학상의 심사위원이 된 은희경 작가를 주로 접했다. 심사위원으로서 문학상 작품에 대해 쓴 짧은 감상평으로 종종 은희경 작가의 글을 만났다.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 책 선정으로 은희경 작가를 접하게 되면서 책을 사기도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유명 문학상 심사위원하는 대작가의 소설로 나의 문학적 수준이 시험대 위에 오르겠군.’
그러나 책을 펼치고 나서 이틀 만에 완독을 해버린 후엔 나의 섣부른 판단에 부끄러웠다. 웃기는 비유지만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같았다. 김연아 선수가 하얀 얼음판에서 음악에 맞춰 연기를 해내는 것을 보면 나도 스케이트 타는 것쯤이야 하며 멋들어지게 탈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막상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겨놓고 올려다 놓으면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자세일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 분야에서 정점을 이루거나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하는 일은 타인이 보기에 수월하게 보일만큼 자연스럽고 애쓰는 모양 없이 유려하고 아름답다. 물론 그의 노력과 고난의 시간을 보지 못한 청중과 독자로서 결과물만 보고 느끼는 단순한 감상평일 뿐이지만 말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 망할 장편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라는 문장을 보고 이 책을 이틀 만에 신나서 읽은 나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작가의 노고를 헤아리지 못하고 너무 즐거워하며 읽었다. 사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재미 분야에서는 최고였고, 독서모임 할 시간이 이렇게 기다려진 책은 처음이었다고 하면 작가의 노고에 대한 뭣도 아닌 독자의 볼품없는 존경의 표현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김유경이라는 주인공이 1977년 여대 신입생 시절 만난 기숙사 동기와 선후배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진행된다. 그리고 2017년의 중년이 된 김유경은 작가가 된 대학 동기 김희진의 이기적인 호기심에 휩쓸려 과거를 회상하고 대학시절 함께했던 그녀들을 떠올리며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그녀의 성격처럼 담담하고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조용히 말한다. 주로 20대 초반 여대생들의 기숙사 생활이 중심이 되면서 여러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는데 그 이야기 하나하나 너무 재밌고 마치 겪어본 사람이 쓴 것처럼 자세하면서 미묘하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대를 졸업했고, 지금 독서모임을 하는 대학 동기들도 그때 그 시절 동아리를 하면서 만났던 10년 지기 친구들이다. 여대 생활을 해서 책 속에 움직이는 개성 강한 성격의 인물들이 마치 내 친구이거나 나의 과동기였던 것 마냥 생생했다. 가장 공감되는 것은 여자들 사이에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미묘한 우정인데, 이 책은 그것 자체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흔히 표현하는 문구로는 진정한 여자들의 우정을 내포할 수 없다고 본다. 여대를 나온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지만 여자들의 우정은 세상 모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미묘하고 오묘하고 순수하지만 뒤틀리고 진하지만 어느새 또 옅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지만 금세 풍요로워지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그것을 섬세하게 표현했다고 본다.
나는 대학을 수업 들으러 가기보다는 동아리 참석하러 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만큼 동아리 선후배와 동기들과의 추억이 어마 무시하다. 지금도 동네 아줌마들과 커피 마시다가 우연히라도 풍물패 동아리 했다고 하면 의외라며 항상 왜 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학 갓 입학한 신입생의 치기였는지 춤도 음악도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내가 이건 내 인생에 다시는 하지 않을 선택이라며 풍물패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시작으로 우리가 되었고 서로의 결혼식과 출산을 축하해주며 지금은 함께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조금씩 먼지를 덮어쓰고 있던 나와 우리의 추억이 생생히 살아났다.
1977년의 미팅 장소나 미팅 방법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연락 방법만 조금 달라졌을 뿐 나와 우리들의 미팅과 남자 친구들 그리고 지금의 남편들에게는 절대 말 못 할 비밀들까지 새록새록 기억이 돌아와 순수하게 즐거운 감정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인물들의 행동반경, 명동과 덕수궁 같은 곳은 나의 20대 추억도 곳곳에 서려있다. 물론 나의 20대에는 다방도 없고 공중전화 박스도 없지만 대학로에서 술 먹으며 미팅하고 막차 놓칠까 정신없이 광화문대로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고 있는 나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련하기도 하지만 쑥스럽기도 하다. 아니 쪽팔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남자 친구 때문에 속 썩으며 밥 한 숟가락 넘기기 힘들어했던 것을 떠올리면 당장 그때의 나에게 쫓아가서 ‘정신 차려, 이년아. 드라마 찍고 앉았네. 정신 차려.’하고 등짝 스매싱 두어 대 갈기고 싶다.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라는 작가의 말에 위안을 느낀다. 나만 촌스러웠던 게 아니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도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이재숙 일행의 여름방학 여행기이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책을 읽고 소리 내며 웃는 일이 드문데 이 에피소드 덕분에 복식으로 웃었다. 덕분에 내가 겪었던 여행기도 하나 생각났다. 동아리 동기들과 새해도 아니고 평범한 겨울방학 중 평일에 일출을 보겠다며 정동진 여행을 감행했다. 정동진행 심야 고속버스를 다 같이 타고 졸린 눈을 비비며 우리 해 보러 간다고 기대에 들떴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 한밤중에 머물 곳 없이 정동진에 내렸다. 낭만으로 부풀었던 우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가로등 하나 제대로 켜지지 않고 문을 연 가게 하나 없는 곳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여자애들 몇 명이 자기들끼리 뭉쳐있는 것을 본 한 할머니가 본인이 숙박업 하는 곳을 우리에게 비싼 값에 제시했고 가격 대비 터무니없는 이상한 방에서 추위를 녹이며 다 같이 해 뜰 때까지만 잠깐 눈을 붙이자며 약속하고 잠이 들었다. 아무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우리는 해가 머리 위에 떠있을 때 일어나 한창 추운 겨울 날씨와 더불어 관광객 하나 없는 평일 겨울바다를 추위에 떨며 대충 보고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그대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재숙 일행의 여행기는 웃기기라도 하지 우리의 여행기는 의미도 감동도 없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잊고 있었던 케케묵은 일기장 꺼내 들춰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청춘 로맨스 영화에서처럼 과거는 항상 부끄럽고 촌스럽지만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그 또한 그것 만의 매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억되지 않나. 물론 책에서 남자 형제를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여대생들 그리고 좋은 집안과 능력을 가진 남자를 찾아 나서는 여학생들, 자신의 능력을 위해 열심을 다하는 여자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다방도 사라지고 공중전화도 사라지고 의상실도 사라졌는데 왜 그런 여자들은 아직까지도 내 눈 앞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카톡으로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고 미팅 어플로 이성을 만날 수 있는 5G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은 바뀌지 않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0년 후에 이 소설을 접하더라도 다방과 공중전화만 제외하면 누구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독자가 항상 존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월 독서모임 때 서로의 기억이 맞는지 아닌지 비교 분석하면서 우리가 깔깔거리며 즐거운 표정을 지을 생각을 미리 하니까 힘들었던 오늘 하루가 그다지 힘들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위로받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