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상에서 꼭 다시 만나요. 꼭.

엄마의 마지막 말들_ 박희병

by 효리더



어렸을 때 일 년에 꼭 두 번 명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포항으로 평균 8~10시간 정도 걸려서 가곤 했다. 그 시절엔 고속도로의 정비도 지금과 같지 않았고 하이패스와 같은 시스템도 없어 톨게이트마다 일렬로 늘어선 자동차들을 방송국에서 온 헬기들이 찍어 명절 내내 뉴스를 통해 보곤 했다. 뒷 자석에서 동생과 나는 거의 눕다시피 몸을 구겨 넣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때때로 운전하는 아빠의 졸음을 쫓기 위해서 스무고개와 끝말잇기로 시간을 이겨나갔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녹지근한 몸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면 거실 한 구석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들릴 듯 말 듯 불경 외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욕봤다”같은 말을 한 다음 그제야 라디오를 껐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채지 못하게 봐온 루틴이라 무심코 넘어갔었는데 좀 크고 나서야 라디오 속 불경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이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게 할머니가 밤새 틀어 놓은 라디오의 불경이 우리 가족을 지켜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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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경상도 사투리와 절에 관한 내용들은 나의 어린 시절 명절 기억 속에 묵혀있던 할머니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초등학교 때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나고 살았던 나는 저자의 사투리 번역을 읽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원어민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할머니나 부모님을 만나면 서울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투리를 쓴다. 마치 경상도 사투리는 모국어이고 서울말은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외국어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어머니가 한 모든 말들이 머리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혔다. 묘한 사투리의 뉘앙스를 나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기에 어머니의 말이 어머니의 억양이 귀에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저자가 어머니 편찮으시기 전에 부모님과 절에서 먹은 비빔밥의 맛을 나는 그 맛과 향마저 알 수 있다. 우리 할머니는 명절이라 오랜만에 모인 삼 형제를 데리고 해도 뜨지 않는 캄캄한 새벽에 평소 할머니가 시주하는 절을 매번 데려가셨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새벽 꼭 큰 손녀인 나만은 억지로라도 깨워 절에 데려가셨다. 어릴 땐 왜 나만 가야 하나 괜히 토라지기도 했지만 자동차 뒷좌석에 할머니와 끼어 앉아 마셨던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리 차갑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절에 도착한 후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법당마다 할머니 따라 몇 번씩 절을 하느라 발이 시려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법당을 돌고 나면 어슴푸레 해가 뜨고 스님과 함께 뜨뜻한 방에 앉아 나물 가득한 비빔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그때는 절에 왜 그리 고양이들이 많이 살았는지, 밥을 먹는 동안 상 아래로 덩치가 산만한 고양이 한 마리가 항상 내 발 앞에 누워있어 밥 먹는 몰래몰래 쓰다듬기도 했었다. 이 책의 작가는 경치 좋은 시내가 흐르는 곳 옆에 앉아 부모님과 절밥을 먹었는데 왜 우리 할머니는 남들 아무도 안 오는 새벽에만 우리를 데리고 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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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쏟아져 나오는 에세이와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서울대 교수님의 힘 있고 단정한 글솜씨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함부로 펜을 들지 않았을 이 문체는 90세를 살아온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을 요즘 흔한 유튜브나 영화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글을 쓰는 아들을 키우고 성장시켰을 어머니의 장미향이 글에 진하게 묻어있다.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어머니 가는 길에 본인이 직접 쓴 책 하나 안겨드리는 모습은 마치 멋진 시상식에서 위대한 감독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트로피를 안겨드리는 장면과도 같았다. 필히 노잣돈보다 그 책 한 권이 먼저 가시는 어머니의 걸음을 가볍고 당당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마다 요즘 시대엔 흔하다 할 수 없는 지극한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과 그에 보답하는 아들의 충실한 보살핌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글로 읽는 독자로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려는 눈물 덩어리는 이별의 슬픔보다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에 의한 이유에 더 가깝다. 오랜만에 내 오랜 추억을 열어보며 진한 감동이 있는 책 한 권으로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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