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_ 한 강
네 번째 독서모임에 선정된 책이다. 한 달에 한 권씩 돌아가면서 책을 정하고 읽기 시작한 지 4개월이 되었다. 코로나 시국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얻는 것들이 많다. 같이 읽음으로써 좀 더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싶다는 의지 때문에 혼자서는 쉽게 지나치는 짧은 사유를 붙잡고 좀 더 깊고 넓게 확장하려는 시도를 종종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마다 독서에도 취향이 있어 잘 손대지 않는 주제 영역이 있는데, 그런 습관에서 탈피시켜주는 역할이 크다. 나는 20대 때에는 주로 한국 소설과 영미 소설 위주로 읽다가 30대가 된 후로는 유명인사의 자서전이나 에세이 위주로 선택하는 취향을 좀 탔다. 물론 이 취향은 과거와 현재의 출판 시장 영향도 있겠다. ‘소년이 온다’는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구의 선정 책이었다. 사실 처음 한강 작가의 소설이라 했을 때 그다지 끌리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더군다나 이 책은 읽지 않은 사람은 있을 지라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는 베스트셀러 아닌가. 30대가 들어서고 나서 나는 베스트셀러는 웬만하면 손대지 않는 몹쓸 습관이 생겼다. 마치 빼빼로데이에는 절대 빼빼로를 사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무의미하고 쪼잔한 반기로서 말이다.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감상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수능 언어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앞으로 올해 수능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수능을 본지 어언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수능날 아침의 스산함과 먹먹함으로 가득한 새벽 공기를 잊을 수 없다. 낯선 학교의 교실에서 받은 첫 언어영역 시험지는 종종 꿈속에서 악몽 아닌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본능적으로 나는 작가가 화자를 왜 ‘너’라고 지칭하는지에 대해 알아내야만 했다. 고등교육 3년간 나의 언어영역의 필수 과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집요하게 찾아내는 데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독자가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의미만 찾아주길 바라는 작가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작가라면 내가 던진 메시지보다 독자 스스로 자신의 견해와 인생에 작품을 비추어 창의적인 의미를 작가에게 되려 전달할 때 더 큰 기쁨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이 독서모임의 의미가 그러하다. 나만의 생각을 뽐내고 전달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생각으로 나의 가치관이 뒤흔들릴 때에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는 향후에 꼭 수능 언어영역 문학 지문에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강력하게 뿜어내는 소설이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도 왜 작가가 ‘너’라는 화자를 만들어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 이야기해보았다. 우리는 수능에서 한참 동떨어진 ‘나’들이기에 자유롭게 답을 낼 수 있었다.
화자가 ‘너’라고 한 데에는 작가가 분명히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독자라면 제일 먼저 그것이 궁금했을 책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보겠다. 사실 ‘너’는 어린 동호이다. 동호는 화자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나’가 아니라 ‘너’로 지칭한다. 동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사람들이 모인 상무관에서 동네 형과 누나들을 도와 시체를 검사하고 유족들에게 인도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어린아이답지 않는 아이다. 동호는 시체들이 부패하는 냄새를 잡기 위해 여러 개의 초에 불을 붙이며 죽은 사람들의 혼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동호는 희생자 혼의 유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작가는 ‘너’라고 동호를 지칭하면서 희생자의 혼이 떠나지 않고 화자인 동호와 함께 책을 읽는 우리와 함께 있고 그 혼이 동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책의 중반쯤에 동호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친구 정대는 혼이 되어 화자로 등장한다. 정대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엔 상무관 쪽의 총성이 들린 후 친구 동호가 자신과 같은 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과 연계해서 동호가 ‘너’로 불린 것은 결국 동호도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한강 작가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개인적 죄책감과 책임감에서 보면, ‘너’는 평범한 독자인 우리 또한 군부독재나 불합리한 권력에 의해 가족과 인생이 송두리째 구렁텅이에 빠져 부패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존재 지칭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열고 덮을 때까지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함께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내내 이 시의 대표적 시상을 ‘부끄러움’이라고 달달 외웠고 윤동주는 부끄러움이었다. 5 다선지의 ‘부끄러움’이라는 정답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시 속에서 시인의 고뇌와 죄책감 따위를 마음속 깊이 감상할 여유는 그때는 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 속 우리를 위해 처절하게 맨몸으로 싸우는 우리들이었을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윤동주 시인이 느꼈을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타인의 인생을 빚진 마음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웠을지도 조금은 알기 시작했다. 한강 작가도 그 빚짐에 대한 무게를 에필로그에서 풀어놓은 게 아닐까 한다. 마냥 읽기만 한 독자에게 이렇게 명치의 중후한 무게감을 던져주었는데 쓰는 작가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는 너무 유명한 작가이고 베스트셀러 문학 작품이라 출판 시장의 미끼일 것이라 폄하했었는데 책을 덮은 후엔 그런 나를 반성하게 하고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 냈다. 대충 한 해에만 존재감을 빛내는 그런 작품이 절대 아니다. 아마 나의 아이가 수능과 같은 시험을 볼 때에 이 책이 언어영역에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의 나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윤동주의 ‘서시’처럼 한국인이라면,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몸속 저 깊은 곳에 새겨진 ‘빚’의 무게를 이끌어내는 한국 문학이다.